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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맛

목소리와 음향

_봄밤 2014. 12. 21. 21:40

 

 

어제 아침 열 시부터 계속 졸리다. 한 번 제대로 깨질 않으니 무려 이박 삼일동안 자고 있는 기분이다. 바닥에 퍼질러져 있기, 누워 있기 엎드려 있기 등으로 몸 면적의 1/4은 늘 바닥과 밀착해 있었다. 그것을 떨치고 이 의자위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뺨을 때렸는가. 의자에 앉기까지 있었던 일을 적어보려고 한다. 여전히 잠이 2%는 들어 있는 것 같아 벌을 준다는 기분으로 차가운 팩(꾸덕꾸덕해지면 떼어내야 하는)을 발랐다. 있다가는 세수도 다시 해야한다. 이대로 삼십분은 춥고 표정없는 얼굴로 있어야한다.

 

일어나서 밥도 먹고 책도 읽고 했지만 흐리멍텅한 상태는 치워지질 않는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잠에서 깰 때마다 뭐라고 뭐라고 적어놓았더라. 살피니, 대체로 쓸데없는 말 가운데 왜 나는 바닥에 누워 있는가. 라는 고민이었다. 따뜻한 바닥이 문젠가 몹시도 추워하는 어깨가 문제인가. 나는 왜 대체 의자에 앉지 않고 바닥에 눕거나 엎드리거나 옆구리로 괴고 있는 것인가.

 

1. 바닥은 따뜻하고 따뜻한 걸 몸이 좋아한다. 몸이 좋아하지 않는 일은 즐겁지 않다. 주말은 즐거워야 할 필요가 있다. 2. 문제는 몸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까지 좋아하는 '일심동체'가 주말마다 퍼질러지는 잠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것처럼 몸에 쓴 것이 마음에도 좋다. 어느 정도의 쓴 약을 몸에게 줄텐가? 3. 의자 위는 너무 춥다. 가뜩이나 수족냉증의 끝판을 달리는 바, 몸이 특히 좋아하지 않는 일이다. 특히 어깨가 추운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주말에, 몸을 불편하게 하고 불쾌하게 하는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의자 위로 몸을 끌어일으키기란 어렵다. 4. 그렇다면 바닥과 의자의 중간 지대를 만드는 것은 어떠한가? 의자만큼 높지는 않지만 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거다. 너무 춥지 않으니 몸을 만족시키고 패대기쳐진 몸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음의 부채도 지워질 것이다. 5. 웃기지 마라. 바닥과 의자간의 차이는 불과 60cm. 이것도 올라가지 못할 의지라면 중간 지대를 만든다한들 일어날 리가 없다. 몸 나부랭이는 그런 중간 지대가 있다고 해도 다시 그 중간의 중간지대를 원할 것이다. 결국 몸은 바닥에 눕는 것과 다르지 않는 상황에 있을 것이다.

 

결론 : 애초에 의지가 부족한 문제를 "의자가 너무 높고 추운 곳에 있어서 앉을 수 없다"는 웃기지도 않게 '의자'의 탓으로 전도한 비겁한 '상황 밀어내기'에서 비롯된 일이다. 말도 안되는 설정을 꺼내는 것은 문제 해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으나 그것으로 마음마저 몸의 즐거움에 동화돼 어처구니 없는 논쟁으로 몸의 기쁨을 지원한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마음의 속내도 별반 다를게 없다.



추신. 글이 안써지면 안써지는 것에 대해서 쓰라는 말을 들었다.



 

빈둥거리면서 <사회문제의 경제학><토지의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적 상상력>을 보았다. 몇 구절을 적어보자.

 

노예제도도 마찬가지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조차 사람을 소유하는 것을 말을 소유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여겼다. 19세기에 이 '자유의 땅'에서조차 인간의 육체를 사유화하는 데 반대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모든 재산권을 폐지하려는 공산주의자, 이교도 혹은 선동가라는 비난을 받았다. p.55. <사회문제의 경제학>

 

모든 토지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곳에 어떤 사람을 데려다놓고는 그에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 일하고 당신 자신이 만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대서양 한가운데 외딴섬에 떨어뜨려놓고는 "당신은 해변을 산책할 자유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아이러니다. p. 138. <사회문제의 경제학>

 

왜 우리는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람을 시혜자로 여기는 것일까? (...) 노동이 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와 자연력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한다. p. 176. <사회문제의 경제학>



<사회문제의 경제학>은 헨리 조지의 가장 대중적인 교양서다. 그는 모든 과세를 토지가치에 부과하는 조세에 집중해 지대의 대부분을 징수할 수 있을 정도로 무겁게 내려서 공동의 목적을 위해 쓰자는 가장 근본적인 개혁을 말했다. 헨리 조지는 19세기의 사람인데, 그의 글은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러시아어 번역판 서문을 톨스토이가 썼다. 그의 글에 대해 이렇게 상찬한다. "진리와 선과 사람에 대한 진실하고도 깊은 사랑"이 있다고. 




사실 자본주의는 인간이라는 천부자원을 다른 인간이 사유재산으로 삼지 않고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바로 임금노동시장이 중심을 이루는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다. 임근노동시장에서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일정한 기간 동안 인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거래된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사유재산으로 삼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일종의 임대시장이다. 사용권을 거래하는 임대시장이 중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는 토지가치공유제와 성격이 유사하다. 인류가 노예제도를 철폐하는 대신 인간 임대제도, 즉 자본주의적 고용제도를 만들어냈듯이, 토지사유제를 철폐하는 대신 토지가치공유제를 도입하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할 수는 없는 것일까? p. 91. <토지의 경제학>


<토지의 경제학>은 우리나라의 조지스트 전강수가 쓴 책이다. <사회문제의 경제학>을 번역한 그는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책에 초점을 맞춰 조지의 토지사상을 지금 상황에 맞추고 보완해 이야기한다. 마침 집을 구하는 시즌도 되었고 해서 두 권의 책이 도움은 안되더라도 의미는 있을 것 같다. <사회문제의 경제학>보다 읽기 어렵다.



 

현대는 불안과 무관심의 시대이다. 이성과 분별력이 작용할 만한 터전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개인의 삶에서는 가치와 그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되는 개인 문제보다는 모호한 불안의 고통이, 명백한 공공 문제보다는 단지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어리둥절한 느낌이 더 많다. 위협을 받는 가치가 무엇이며 그것을 위협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밝혀진 적은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들은 결정 지점까지 옮겨지지 못했다. 그러니 사회과학의 문제들로 올바로 정립될 리가 없다. p. 25. <사회학적 상상력>

 

연구를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은 어떤 사람의 어떤 목소리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저술은 전혀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동적인 음향(sound)이다. 그것은 기계가 만드는 산문(散文)이다. 그것이 전문 용어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대단히 허식적이라는 사실만큼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비인격적일 뿐만 아니라 허례적으로 비인격적이다. 정부의 관보(官報)도 때로는 이런 식으로 씌어진다. 상업 통신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많은 사회과학 역시 그렇다. 진정으로 위대한 문장가의 글은 예외지만,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글은 나쁜 글이다. p. 270. <사회학적 상상력>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끝 부분이다. '장인 기질론'이라는 부록에서 사회학을 연구하는 연구자의 태도, 연구자의 자세를 설명하는데 특히 글을 쓰는 태도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목소리와 음향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한다. 비단 사회학이 아니더라도 어떤 연구자에게도 통요될 수 있는 자세라고 여겨진다. 내가 그것을 '하지 않았던' 것은 내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있는 쓰기를 더 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게으르기 좋아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몸과 마음의 협동으로 바닥에서 뒹구는 주말을 보낸 나부랭이다. 팩이 마르면서 얼굴이 당긴다. 이걸 떼어내면 입이 자유롭워진다. 노래를 부르자.

 

 

세 권의 책은 모두 돌베개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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