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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쓸모없는 글을 쓰고 문득 눈이 아득해져서 나가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서둘러 옷을 채우고 후드를 썼다. 계단을 내려와 바닥을 디디려는 순간 수 많은 점이 한꺼번에 찍혔다. 당황했다. 고개를 드니 비가 이제까지 오지 않던 비가 현관을 디디자마자 내리는 것이다. 한 발을 내놨다가 호박모양의, 어깨를 폭 감싸는 우산이 지나는 걸 보고 우산을 가지러 올라갔다. 천으로 손잡이가 마감된 것은 고풍스러웠지만 무거웠고 안팍이 마구 보이는 비닐우산을 들었다. 무엇보다 가볍다는 미덕이 있다.
한 시간쯤 돌고 들어와 이렇게 흥분한 까닭은, 말도 안 되는 글을 하나 읽었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소설의 이름을 달고 이렇게 아름답지 않은 글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정밀한 기계가 쓴 것처럼 군더더기가 없으나 함께 마음을 울리는 것도 없었다. 선뜩한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소름이 돋거나 공감을 구하거나, 그런 것 없이 그저 써 내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위트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조차 정교하게 짠 것이라 감동이 크진 않았다. 무척 오래 썼을 것 같지만 구조가 어려웠던 것은 아니고, 그래 문장과 문장을 잇는 마침표에 자석이라도 붙은 듯 맞아 떨어지는 게 놀라웠다.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라는 제목의 글인데, 물론 나는 여기에서 아는 거라고는 "두 번째" 밖에 없어서 두 번 읽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람, 하여간 읽었다.
전에 없이 수다스러운 까닭은 그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소설에 설명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동명의 단편을 제목으로 한 소설집이 나왔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금각사도 울고갈 금칠의 평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평론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근엄을 잃고 소설을 읽는 평론은 또 오랜만이라서 내립따 읽었다. 그러니까 보르헤스와 빗대 칭하는 이 평론에, 나는 또 보르헤스를 모르기 때문에 막히는 부분이 많았지만 하여간 대답은 ' '는 것이었다. 그는 소설과 그 자신 동시에 상찬을 받고 있었다. 재능 있는 작가의, 재능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판단이 아니라 사실 (fact)에 가까운 진술이라며, 믿지 못하겠으면 단편을 하나만 읽어보라고 권했다.
암스테르담 가라지 세일 두 번째-김솔(누르면 본문으로 이동)
이 단편은 왜 알지 못한 것인지 생각하니...지나쳤다. 전문이 올라와 있었고, 그래서 글씨 크기를 좀 키우고 읽었던 거다.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래서 글이 기계처럼. (정확하거나, 오차가 없다는 말보다는 사람을 통과한 것 같지 않다는 뜻에 가깝다. 잘 마감된 건물을 볼 때 매 부분에 사람이 가담했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손을 댔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같았던 것인가, 인터뷰를 읽고 작가의 말을 읽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소설집을 읽어야겠다는 확신이 든 것은, 문장은 하나도 아름답지는 않지만 문장이 이루는 논리가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긴 작가의 말이라니. 작가의 말을 8번쯤 쓰면 단편 하나가 완성되겠다. 옮겨온 부분은 특별히 생각할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쭙잖은 글 덩어리에 가족들의 생계를 모두 배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큼은 여전히 고무적입니다. 가독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글을 쓰고도 이렇게 뻔뻔스럽게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달리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제가 지금 기대하고 있는 것은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보다는 출판사의 인내심과 모험심입니다.
그는 벨기에에 있고,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소설을 쓸 수 있는 것 같다. 출판사의 인내심과 모험에 관심을 두고 있다라. 마음의 진동에 관심 없는 대신, 독자가 갖고 있는 사고(시공에 매여서 도저히 틈이라고 보이지 않는)를 흔들고 싶은 글을 쓰는 소설가로 살아가기 위해 더 없이 정확한 판단이리라.
+
사족
ㅁ음사에서 나온 소설 중 어떤 것은 그것을 시작해서 마침내 끝낸 것에만 의의를 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오직, 소설이 갖춰야 요소 중에 분량만을 갖춘 것이어서 대단히 실망한 적이 있다. 아. 분량만 안됐어도. 그러나 그걸 그렇다고 말하진 못했다. 그러나 그것을 쓰느라고 고생한 작가를 생각하느라. 하긴, 분량을 갖춘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하고 읽었다. 작가의 첫 소설집이었고, 장편이었다. 내가 근래에 쓴 시간 중에 가장 아까웠던 시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라나는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긴 희망을 잃기 전에 차라리 한 문장을 더 써라. 라는 말을 전한다.
이 글을 읽는 데는 앞에서 말한 분량을 갖춘 소설과...비교할 수 없고 십오분만에 읽었다. 그러나 나는 그걸 이해하기 위해 앞으로 여러 번 읽을 것이다. 여러 번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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