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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문학동네.


영화,『도희야』 







원장면들
어느 날 당신은 벌겋게 익은 수박 속을 숟가락으로 파먹다가 갑자기 그 수박을 길러낸 식물(그걸 수박풀이라 해야 되나, 수박나무라 해야 되나), 그저 잔가시가 촘촘히 붙은 뻣센 너울과 호박잎을 닮은 잎 새 몇 장으로 땅바닥을 기는 그 식물이 불쌍하게 생각된 적은 없는지. 여름날 뙤약볕에 쪼그리고 앉아 땅속 깊이 주둥이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길어올려 벌건 과즙으로 됫박만한 수박통을 가득 채운 끈기와 정성은 대체 어디서 전수받았으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단지 쥐똥만한 제 씨알들을 멀리 날라줄지도 모를 낯선 것들에 대한 대접으로는 도에 지나친, 그 멍청한 희생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250p



연민은 상대와 나 사이 놓인 유리의 이름이다. 유리 너머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세계다. 연민은 상대를 나에 빗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 사이에 있는 유리에 나를 뚜렷하게 비추는 일이다. 그래서 상대를 가여워 하면 할수록 그 유리에 튕겨진 마음을 다시 받는다. 연민은 나를 위로할 뿐이다.


여기 수박을 먹다말고 수박의 도에 지나친 멍청함에 혀를 차는 사람이 있다. 여름날 그 뜨거움을 다 견디고 이렇게 파 먹히는 생이라니. 담담히 말하는 시인이 있다. 시인은 이런 식으로 책 내내 아프라고 썼다. 산문이라 시 되기 전 언어이겠으나 시를 넘어간 언어라고 하고 싶다. 시인은 마음 없이 수박과 읽는이의 상태를 묻는다. 당신은 이것을 한 번 생각해 보았나. 대답이 들릴리 없고, 시인은 수박의 한 생을 먹으면서 낯익은 듯 바라본다. 이 시선.




영화 <도희야>에서 영남이 도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영남이 도희를 '볼 수 있는 것'은 도희와 영남의 세계가 다르면서 닮았기 때문이다. 쓰러져 가는 집, 할머니와 아버지의 욕과 구타, 어머니의 부재.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 속에 도희는 혼자다. 혼자이고 싶을 정도로 혼자다. 영남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도희는 그 속에서 춤을 추며 싱긋 웃는다. 영남이 도희를 궁금해하는 것은 이 웃음이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걸까. 영남은 멀리 바닷가로 밀려나온 것만큼 웃음에게서 멀다. 


영남이 도희를 가여워 하는 것은 과연 영남이 도희의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묻는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그래서, 시인은 수박이 될 가능성 있는 것일까? 의문하는 것과 같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남은 연민이 아니라 진심이고 싶다. 영화는 우리를 통과하기 위해서 부숴야 할 유리에 대해서 말한다. 유리를 통해 보이는 안팎은 같지만 그것으로 상대와 나는 더 가까워 질 수 없는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다. 그러니까 볼 때와 건너 갈 때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 겨우 두 달 도희를 맡았을 뿐인데 예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영남을 기다리는 것처럼. 유리를 깬다는 것은, 반대편에 서 있는 이에게만 아니라 깨는 이의 고통을 몇 배로 담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사이를 다 깨지 못한 후 영남은 바닷가를 떠나며 도희와 멀어진다. 이 사이.


원장면은 이어진다. 
어느 날 당신은 고속도로에서 밤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흰 눈송이 같은 것이 차 유리창을 스치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떠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밤꽃 향기 진동하는 오월의 따스한 밤, 그 많은 눈송이들이 앞서가는 닭장차에서 날려오는 하얀 닭털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경이를 아직도 기억하는가. 십 층도 넘는 철망 아파트 칸칸이 분양받은 수백 마리 하얀 닭들이 쇠기둥 사이로 모가지를 빼내 물고 파들파들 떨면서 날려 보내던 흰 날개 깃털들, 애초에 겨울에 오는 흰 눈도 그렇게 해서 빠진 가엾는 깃털이었던가. 어쩌면 그 흰 터럭지는 입관 직전 알코올에 적신 거즈로 마구 문질러 시멘트 바닥에 흩어지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머리칼이 아니었던가. 250p



환각과 착각의 진심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밀려온다. 눈처럼 흩어지던 닭털이 시멘트 바닥에 흩어지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머리칼이 된다. 연민 오기 전에 환각이다. 대상에게 마음하기 전에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마음해 버린다. 영남이 돌아섰다가 돌아와 도희에게 떠나자고 말했던 것은 혼자 남겨진 도희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환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둘은 분명히 다르지만 착각을 걷어내도 진심은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비가 쏟아진다. 차라리 배려라... 앞이 밝을 수는 없어서 죽죽 긋는다. 영화는 이것을 알고 있는 영남의 얼굴과 모르고 자는 도희의 얼굴을 지난다.


자신의 한 때를 먹듯
시를 쓰는 이유는 이 착각과 환각의 진심이 현실에서 도무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유리를 부술수는 없어도 빛을 이용해 저 쪽에 불을 지필수는 있다. 마음을 전하는 것은 태양에 돋보기를 대어 종이에 연기를 내는 일일지 모른다. 시는 크고 깊은 볼록렌즈로 마음을 통과한다. 반대로 <도희야>는 스크린 통째로 깊은 암막이 되어 빛을 흡수한다. 어둠으로 사이를 좁혀 묻는다. 마음을 전하는 일이 왜 위험한 것인지, 상대와 나의 사이를 좁히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결국, 우리는 건너가야 하는 '사람'임을 이야기 한다.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왜 아무말도 못했는가', 서로의 눈을 보는 시간에는 입이 사라지는 마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상이었을 수박과 닭털이 내것이 되는 환각. 그래서 <도희야>와 이성복의 산문집은, 우리를 가로막은 유리를 건널 수 있다는 참혹한 희망이다. 수박이 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한 때를 먹듯 수박을 퍼 먹는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유리가 우리가 될 때. 더 없이 투명해지는 모습을. 한 생에서 마주치기 어려운 몇 안되는 시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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