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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위의 포뇨>, <에코의 초상>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없는 다섯 살의 마음이 있다.

 

'무모하다'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이 말은 앞 뒤를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으로. 시간의 층위를 어지럽힐 때 쓰인다. 가령 어른들에게 '아이의 눈으로 보세요'라고 조언하는 것이 그렇다. 이 조심스러운 청유에 아이의 눈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겠으나 어떤 어른도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하지 못한다. 간신히 키를 낮춰 아이의 시야를 엿볼 수 있을 뿐. 그게 가능했다면 오래전 어린왕자가 우주를 떠돌 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을 한 명은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전에서 어른들이 증명하듯이, 어른은 자신만의 눈을 갖고 보기에도 벅찬 사람들이라 자신이 지나온 것을 망각하고 앞으로 밟게 될 시간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시인은 이 짧은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놓았던 것 같다.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인간의 시간」부분. 우리는 앞 뒤로 나아있는 시간은 모르며, 오직 내가 속해 있는 구간에만 발을 담글 수 있다.

 

이 중에 '아이들'만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놓고 싶은 마음을 고백한다. 그들의 살결, 냄새, 그들의 말, 그들의 머리카락 냄새 이 모두를 인간의 것으로 하기에 너무나 향기롭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어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성정이다. 다시 말해 아이에게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에 있지 않다. 데몬기로 변해버린 바다에서 장난을 치고 장난감 배를 크게 만드는 마법을 의심하지 않고 올라탄다. 이들은 쉽게 '무모'하다. 풍덩거리며 앞 뒤를 헤아리지 않고 빠진다. 이걸 본다면 어른들이 '위험'하다며 아이를 제 앞에 놓을 일이다. 어른들은 자신이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 시간에만 아이를 두려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놓기 위해 바다에서 길을 헤메는 아버지와, 아랫말에 있는 요양원을 걱정해 떠난 어머니가 있다. <벼랑위의 포뇨>에선 부모가 있어도 부재하는 것과 다름없다.

 

한편 인간인 아버지와 바다의 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포뇨가 파도 위를 뛰어다니며 소스케를 찾았던 것은, 그가 아직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다섯 살이었기 때문이다. 포뇨만이 인어라는 신과 인간의 중간적 지점에 있던 것이 아니고 소스케 역시 아직 인간이 아닌 존재였기 때문에 이 둘은 만날 수 있었다. 어른의 눈으로는 소스케의 불안정, 미성숙함이라고 붙여질 특성들이 신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되었다. 소스케와 포뇨가 어떤 고민도 없는 것은 둘이 만났던 기쁨을 어느 시간에라도 옮겨올 수 있는 아이만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오래전 인어공주가 물거품으로 변해버리며 비극에 이르렀던 것은 그때 왕자가 이미 완벽한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인어공주를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제 삶을 다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모험이다. 인어공주는 왜 완벽한 어른-남자를 꿈꾸었을까? 이것은 자신을 '어른 여자'와 혼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혼동은 인어공주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것을 볼 관객의 마음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소스케와 포뇨의 만남에서 유일하게 걱정했던 사람이 포뇨의 아버지였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를 도울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인간이었다가 물속으로 내려온 이, 아직 인간이었을 때의 태도를 갖고 있다. 어른-남자로서 포뇨를 걱정한다. 물론 너무나 빨리 딸을 내보내는 아버지로서의 마음도 감출 수는 없다.

 

포뇨가 이름을 지어준 이와 사랑에 빠지는 부분도 짚고 넘어가자. 소스케는 포뇨를 보고 얼마 있지 않아 '포뇨'라고 하자며 불러주는데 포뇨는 그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포뇨'가 되기로 한다. 물론 이전에 포뇨의 이름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불러주었던 이름이 있었으나, 엄한 아버지는 이들이 물속에서 살면서도 물 밖을 보러 나가는 일을 막는다. 인간의 바다에 가까워지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보호라는 명분에서 역시 '인간'이었던 속성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포뇨 이전의 이름은 소통이 아니라 금기를 알려주고 혼내려는데 필요한 지칭으로 사용된다. 이것은 포뇨의 특성을 무시한 채 아버지 자신이 만들어낸 어떤 위대한 대상을 칭하는 듯 한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부르면서 동시에 자신이 듣고자 하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사랑이 있다고 믿어야 할까. 사랑하는 이를 부르는 이름이란, 내가 부름으로써 기뻐지는 무엇이 아니라, 상대를 더할 나위 없이 표현하면서 그가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어야 한다. 포뇨의 아버지는 세계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는 신적인 의무에 심취한 나머지 가까운 사랑을 돌보지 못한다.

 

포뇨가 제일 중요한데도 나는 포뇨라는 이름이 무슨뜻인지 모른다. 포뇨라는 이름을 수소문하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고리타분하게도 이것을 언어-일본어의 문제로 받아들여 일본어를 아는 이에게 대답을 구하고자 했다. 그녀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포뇨가 당뇨와 비슷한 거라고 답했다. 애초에 아이들의 영역에 있는 언어를 어른에게 물어 알고자 했던 무모함의 결과였을지. 아직도 포뇨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포뇨. 라고 부를 때 입이 금붕어처럼, 혹은 뽀뽀하기 전처럼 준비된다는 것은 안다.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물결처럼// 우리는 깊고/ 부서지기 쉬운// 시간은 언제나 한가운데처럼 「인간의 시간」 전문

 

결국 <벼랑 위의 포뇨>를 다 보아도 나는 감독의 말처럼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고 단순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물어본다면 포뇨! 스키! 라고 대답하려나. 우주를 안고 태어났으나 마침내 한 점으로 소멸되고자 하는 인간에게 보내는 메세지로 더듬어 읽을 뿐이다. 깊은 바다 물고기가 있는데 그 물고기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이것을 의심없이 믿어버리는 무구한 마음을 가진 이에게 보내는 편지다. 주먹을 쥐고 태어났을 무렵 우주적인 시간을 다 갖고 있었으나 자신이 무엇인지 알아갈 즈음 자신의 그림자, 몸뚱이, 마침내 발밑으로 시간을 축소해나가는 이들에게도 역시 부쳐진다. 자신의 힘으로 통제 가능한 시간에 기대 사는 이들은 꼭 그만한 폭으로 줄어든 언어를 갖는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가 그토록 가혹한 것인지도 모른다. 슬픈일을 표현할 방법이 '슬프다'밖에 없다면, 당신의 슬픔에 대한 폭력이 아닐지. 그래서 간혹 에코의 초상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시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리는 ‘메아리의 초상을 그리는’ '무모한 인간을 만날 수 있다. 시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이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고, 당신이 인간의 시간에 흡족하기 때문이고, 그러나 한때 당신이 시간의 층위를 마구 헝크러뜨리고 웃었던 아이였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지가 다 날리는 원론적이 이야기이겠으나, 결국 자연의 거대함을 받아들이고 소통할 수 있는 인간이 되라는 것, <벼랑위의 포뇨>건네는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더 어린 아이들"을 불러왔던 것은 아직 그런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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