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증명이 필요한 행복 - 황정은, [상류엔 맹금류]




나는 그날의 나들이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해왔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이다.




주인공 '나'는 남자 A와 B를 만난다. 나는 A와 더 잘 맞고 어울리는 것 같다. 어쩌다보니 그의 가족도 만나고, 자주 만나게 된다. A의 가족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서로 아낄 줄 안다. A의 가족은 나와 A의 결혼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B와 결혼했다. 어째서일까. 




라는 이야기는 양귀자의 <모순>에서 볼 수 있었다. <모순>은 나 '안진진'의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엄마의 삶과와 대조되는 쌍둥이 이모의 생활, 그녀의 가족 이야기까지 담는다. 이곳에서 안진진의 연애사는 소설의 몇가지 주제 중 하나다. 이것을 확대하자. 조금더 시니컬하고 건조한 문체로, A라는 남자에 대해서만. <상류엔 맹금류>는 그렇게 시작된다. 내가 바라보고 들어온 제희와 제희의 가족사다. 이곳에서 '나'의 이야기는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최소한의 문장들. '나'는 제희의 가족을 이야기 하는데, 그 이야기는 거꾸로 '나'를 밝히는 것이 된다. 이상하다. '나'는 그런걸 의도한 적이 없다.


<상류엔 맹금류>를 한마디로 줄이면 '그날 남자친구 부모님과 함께 수목원에 갔어.'다. 그녀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보자. 짧게 이야기 했을 뿐인데 득달같이 달려드는 물음들이 그려진다. '좋았겠다, 어땠어?' 어떤 악의도 없는 물음에 뜨악하며 그녀는 망설여 진다. 나 또한 그렇게 자주 물었었지만, 듣는 입장이 되면 '좋음'을 기대하는 질문에 충족시키려는 대답은 너무나 짧다. '좋더라, 나무도 많구' 정도로만 대답한다. 그래? 부럽다아~가 작게 들리고 그녀가 별 말 없이 씁쓸하게 웃는것으로 대화는 종료된다. 여기서 '씁쓸하게 웃는 순간'이 진짠데, 이것이 말해지는 일은 거의 없다.  말하고 싶을 때가 와도 정확히 어떤 부분이 씁쓸했는지를 알 수 없고, 물어보는 사람도 그런 대답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행복을 연출하려고 모인 가족은 원치 않는 불협화음을 연주할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모른척한다. 가족 전체가 다 듣지만 누구도 그것이 '이상하지 않아?'라고 묻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음 맞지 않는 연주조차 행복의 증거로 쓰여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를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까닭은 서로의 행복이 다시 서로의 행복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너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을을 말하는 것이다. 가까스로 가족이란 이름을 지탱할 수 있다. 그래서 역으로, 나의 불행을 말하는 것은 실은 너의 불행을 고백하는 것과 같. 그래서 나는 최대한 행복한 포즈를 취해야 한다. 아직 제희 가족의 일원은 아니었던 '내'가 무심코 말했던 그날의 '불행'- '이거 똥물이에요. 똥물.'-은 그 자리에 있던 '나'의 불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불행을 선언한 것과 같다. 수목원을 다녀오고 한참이 지난 후 '나'는 제희와 헤어지는데, 헤어짐이 이 나들이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 후로도 종종, 무심코, '함께 있음의 불행'을 툭툭 내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다


모를리 없다. 그런 노력에 '나'도 있고 싶어하지만, '나'는 제희의 부모님이 곗돈을 사기당했을 때, '아이들 모두를 키우면서' 다시 일어서기로 했던 선택을 긍정할 수 없다. 옳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제희의 부모님은 결국 빚을 다 값지 못한 채 늙고 빚을 네 형제에게 물려주기 때문이다.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 시설에 맡길 수 없었다. 는 서술에는 진실이 가려져 있다는 문제제기다. 이어지는 '나'의 독백은 꽤 정확하게 아픈 곳을 누른다.


자신들의 양심과 도덕에 따랐지만 딸들의 인생을 놓고 봤을 때는 부도덕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흘러 오늘, '나'는 수목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날 나들이에 대해 느꼈는 '죄책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된다. 바로 '불행'을 고백했다는 것. 영원히 함구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말해지면, 진짜가 되버리고 그렇게 되어진 상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나'는 인정할 수 없겠지만, '나'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행동이 제희의 가족을 놓고 봤을 때는 부도덕한 선택이었다. '그날의 나들이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이야기 할 수록 가까워지는 것은 양심과 도덕이 부도덕한 선택을 낳고, 부도덕한 선택이 양심과 도덕에 가까워지는 이상한 현상이다. 결국 '나'는 그날  나의 반동과 제희의 부모의 말이 같은 역설을 지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하며 소설은 끝난다. 나는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나에게만 한하는 양심과 도덕을 지켜냈다. 표면적으로 '나'는 제희네와 다르기 때문에 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감추고 있는 실제는 그날의 일로 하여금 '내'가 제희네와 너무나 닮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다름'을 오래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오래 하면 할수록 내가 알고 싶지 않는 진짜 까닭을 밝히는 이유로 이 소설은 가능하면 짧아야 했다. 그래서 아주 짧다. 두번 읽고 싶을 정도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