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망설이는 사랑> 케이팝 아이돌 논란과 매혹의 공론장 안희제, 오월의봄

 

그렇기에 누군가와 함께 덕질하는 일, 아이돌 아티스트가 건네는 행복의 약속을 공유하는 일은 팬의 삶에서 큰 의미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지위에 소속되는 일이며, '허상'이나 '망상'과 같은 말로 불리던 승인되지 못한 욕망을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공간에서 승인받는 일이다. 즉 덕질에서 발생하는 것은 정체성의 전환이다. 그래서 팬덤은 본진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밈으로 활용해 소통하는 식으로 특정한 형태의 고유한 집단기억과 문화를 갖게 된다. 

 

44p

 

이처럼 망설임을 끝내지 못하는 것, 끊임없이 문제에 놓이는 것은 팬들의 감수능력에 의해 가능해진다. 가브리엘 타르드는 "타자에게 매혹되고, 빙의되고, 그 위세에 포획되는 인간, 타인의 영향력에 휘말리고, 암시받고, 매료되는 인간"으로부터 사회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서의 모방은 암시에 걸리는 자, 즉 감수가로부터 시작되며, 사회는 모방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동성은 능동성의 선행 조건이며, 주체는 타자에게 응답하는 행위자이기 이전에 타자의 매혹을 겪고 감수하는, "다른 존재들이 가하는 행위의 작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자"이다. 

 

289p

 

 

덕질은 현상이 아니라 문화도 아니라 일종의 '사회'일 것이다. 아이돌 덕질에 대해서 탐구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담겨있다. 특히나 "특정한 형태의 고유한 집단기억과 문화를 갖게된다"는 말은 인사이트이면서 위로도 되었다. 

 

--

 

<완전한 연주> 케니 워너 지음 이혜주 옮김 현익출판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것

쉬움과 어려움이 아닌, 익숙함과 낯섦의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자신에게 '이 곡은 어려워'라는 메시지를 주면 그 곡은 우리를 좌절시킬 것이고, 곡을 다 익히고 난 후에도 여전히 연주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오늗 음악이 쉽다고 믿으면, 당신은 그 곡이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이라 생각할 수 있다. 아직 쉬워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곡이 쉽게 느껴질 수준까지 충분히 연습하지 않았을 뿐이다. 음악은 쉬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비결이다. 

 

139p

 

재즈 스탠더드 <All the Things You Are>에서 완벽한 예시를 찾을 수 있다. 이곡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어디인가? 많은 연주자가 브릿지의 후반부(곡의 중간 부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어려울까? 그 부분은 단순한 II-V-I(기본적인 코드 진행)일 뿐이지만, E장조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들이 E장조에는 재능이 부족한가? 창의력이 부족한가? E장조는 어려운 조인가? 아니면 그냥 덜 익숙해서인가? 그게 정답이다. (기타리스트가 아닌 이상) 재즈 연주자는 E장조로 연주하지 않는다. 139p

 

- 요약

숙달은 두 가지로 구성된다. 

 

1)음악이 스스로 연주하도록 옆으로 비켜서기

나는 무엇이 나오려고 하든 이를 받아들인다. 사랑으로 받아들이되,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를 같은 크기의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연주를 잘해야겠다는 욕심에 난리를 치는 대신 힘들이지 않는 공간에서 연주한다. 

 

2) 곡을 언제나 생각 없이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능력

나는 곡이 알아서 저절로 연주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철저하게 연습한다. 자아는 더 이상 나를 공포에 떨게 하지 못한다. 제대로 소화된 곡은 유기적으로 흘러나오며 나의 목소리로서 나타난다. 힘들이지 않는 테크닉, 힘들이지 않는 언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려는 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들이 '숙달의 공간'을 위한 구성요소다. 

 

162~163p

 

알고보면 맞는 말인데 누가, 그것도 대가가 이렇게 말해주니까 명언처럼 보인다. 어려운 곡은 없다, 연습하지 않은 곡만 있을뿐. 

 

 

<디지털 세대의 아날로그 양육자들> 소니아 리빙스턴 얼리샤 블럼-로스 지음 박정은 옮김 감수자 김아미 위즈덤하우스

 

정책 및 교육 계획으로서 '코딩'은 이 맥락에서 특히 애매하다. 코디안으로 기업의 고위 간부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만들고 창조하고 손보는 것을 보상하는 새로운 디지털 시장에서 일부 아이들은 코딩을 통해 커리어를 쌓는데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준이 각기 다른 미래의 기업가, 창작자, 프로그래머 사이에서 핵심적인 차이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 코딩을 배우는 것이 디지털 분야에서의 블루칼라 일자리로 이어질 수도 있다. 즉 수십 년 전 폴 윌리스가 말한 것처럼 "노동을 배우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스킬의 필요성에 대한 대중의 낙관론과 공인된 예측에도 불구하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직업들을 포함해 '디지털 일자리'들은 그것들이 대체하는 여러 종류의 일자리들만큼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경제의 여러 분야에서 나타나는 기술혁신의 빠른 속도와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고용 관행을 생각하면 기술 전문 지식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미래에 관련된 직장을 얻을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19p

 

역시 공감되는 이야기. "노동을 배우는 것"일 수 있다. 학문이 아니라 노동. 그러나 이왕 배운다면 노동을 배워놓는 것도 좋겠지. 계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이제 완전히 디지털세대가 낳은 디지털세대의 아이들이 있을텐데 그들의 양육은 어떻게 달라질 지, 어떤 새로운 사회를 만들게 될지 궁금하다. 

 

 

<문예 비창작: 디지터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 케네스 골드스미스 지음, 길예경 정주영 옮김, 워크룸 프레스 

 

 

전통적으로 작가는 글이 술술 '흘러'나오도록 심혈을 기울였지만, 조이스에게 영감을 얻은 언어/데이터 생태계의 맥락에서 이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띠는데, 왜냐하면 작가가 이 생태계의 보관자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생성적 개체라는 전통적 위치에서 조직 능력을 지닌 정보관리자로 위상이 바뀌면서 작가는 여차하면 한때 프로그래머, 데이터베이스 관리자, 사서의 직무라고 여긴 일을 맡을 각오를 한다. 따라서 아키비스트, 작가, 프로듀서, 소비자 사이의 구분도 흐려진다. 

 

조이스는 조너선 리섬과 유사한 방법으로 물에 관한 백과사전 항목을 짜깁기해 이 구절을 구성했다. 그는 언어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며 언어으 유동성을 적극적으로 보여 준다. 조이스의 글은 비창조적 글쓰기의 전조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단어를 분류하고 어떤 것이 '신호'이고 '소음'인지를, 즉 그대로 둘 것과 뺄 것을 가늠하는 행위를 통해서였다. '데이터'와 '정보'라는 다양한 상태의 언어를 식별하는 일은 이 생태계의 건강을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55-56p

 

21세기 데이터는 대개 단명하는데, 그 이유는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데 있다. 

 

 

내가 보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데이터. 무수한 데이터. 책이 아니라면 그저 데이터의 군집과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착각이고, 그저 많은 데이터를 접하는 것일 테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