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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의 회사에는 가까운 곳에 과일가게가 있었다. 외근을 마치고 들어가기 전에 무슨 과일이 있는지 좀 보는 게 일과였다. 그래 봐야 그 작은 가게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 계절을 말하는 과일을 낯빛을 저기서 여기까지 한 번 둘러보면 끝이었다. 색색 다른 건반을 보듯 저마다 다른 색, 다른 크기의 동그라미들이 누워있는 가판이었다. 햇빛이 좋았던 어느 날, 두꺼운 박스에 한라봉이 소담스럽게 담겨 있던 것을 보았다! 나는 당장 그 한라봉이 되고 싶었다. 울퉁불퉁하지만 둥글게, 자신의 최대한으로 잘 자라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얼굴로 누워있는 게 좋아 보였다. 멀리 살던 연이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었다. 우리는 한라봉이라니. ㅋㅋㅋ하고 웃는 게 전부였다.
그게 몇 년 전이었다.
셔틀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2키로미터 남짓의 거리는 사방이 어둡다. 요새 노을은 자주색으로도 지는데, 그런 이른 밤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게 마련이다. 이 길가의 특성인지, 아니면 이 동네의 특성인지 "폐점합니다" "마지막 세일"하는 가게를 네 개도 보고 다섯 개도 본다. 그 현수막에는 늘 감사하다는 인사가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임시로 그곳에 들어가 있는데 현수막으로 내건 말처럼 며칠 내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일주일도 있고 열흘도 있고, 한 달도 있는데, 그 시기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왜냐면 이미 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좀비인 것이다. 죽었는데 물건을 파는 가게인 것이지. 대체로 엉망인 조명에, 공장에서 거의 떼온 물건이나 다름없어 최저 가면서도 훌륭한 품질임을 말한다.
어제는 내가 그 가게인 것 같았다. '그만 둡니다. 여기 까집니다.' 진짜예요.라고 말하고는 녹음한 목소리는 지치지 않는다. 이것은 최고의 품질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세일입니다. 그 오늘이 벌써 몇 달째 지연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아, 어느새 그 싸게 판다는 가격이 원래의 가격을 잊어버리고 정말 그 물건 값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걸으면 자줏빛 노을이, 검은 밤에 질질 끌려 마침내 다 어두워진다. 아, 어두워져도 걸어야 한다. 아직 집이 아니니까.
나는 폐점을 선언한 가게처럼 일을 하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장소에 물건만은 최상인 양 양껏 떼와서 팔고 있다. 그런 가게에서 서성이다가 속옷을 사 본 일이 있다. 파시는 분과 꽤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도 이런 걸 입는다. 흰색으로 입는다. 색이 안들어 간게 더 좋더라... 라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길게 하셨다. 제가 말이 좀 많지요? 하고는 입을 가리고 웃으셨다. 하하하... 이름 모를 속옷 브랜드 중에서도 최상의 것을 추천해 주셨다.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사지 못해서, 그곳에서도 그 다음으로 좋다는 물건을 샀다.
아, 속옷은 물론 트렁크다. 트렁크는 정말 훌륭한 사물이다. 속옷인데 바지라니. 한라봉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폐점하는 가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그 사람은 얼마나 나아진 것일까? 한라봉...을 생각했을 때 이미 제주도에 한 달 살이라도 했어야 했을까. 어제는 문득 내 손목을 잡아보고, 이건 거의 뼈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고, 무슨 소설 속의 대사 같다고 생각했다.
연아, 그건 거의 뼈 같아.
연이는 손목을 보며 대답이 없었다.
연차는 이제 두 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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