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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부
리산
내가 떠나온 그 밤에 폭설이 시작됐다는 말을 들었다
누가 눈보라 치는 들판에 불을 놓았나
눈꽃과 불꽃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을 겨울 까마귀들
평생 그곳을 그리워했지만 다시는 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같이 웃고 울기도 하다가
다시 만난 기쁨에 손을 꼭 잡고 행복해 하였더라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 사이로 능동과 부정 수동과 긍정 사이로 나부낀다
눈이 오지 않던 눈의 땅 눈보라 눈보라를 기다리며
올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한 잎씩 떼어내던 꽃잎 점 이파리들
안개 낀 국경을 넘어가는 야간열차의 불빛을 바라보며 하루 한 번
한 바구니의 홍합과 꽃가루가 점점이 떠 있는 맑은 차를 구하기 위해
거리의 끝으로 갔었다
그런 어떤 밤이면 길을 잘못 든 고라니들은
산기슭으로 난 도로를 따라 숲으로 돌아가고
나는 거리의 끝으로 향하는 지방도로 그 길의 한 가운데
전조등도 상향등도 없이 문득 멈추어 서 있곤 했다
어둠의 빈틈을 메우며 어둠과 한 덩어리가 되어 서 있던 그 때
귀신이 귀신을 알아보는 밤이 있었다
종일토록 혼선되던 전파도 툭 끊어지고 밤이면 정적만이 송출되던 단파 라디오 소리
제각각 제 모국어로 말하는 그곳의 이름을 칠흑의 전부라고 발음해 보는 밤이 있었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다시 길을 그리며 떠돌던 그 때 겨울 전부
리산,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문학동네, 2013.
엊그제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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