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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다음 주 월요일의 연차와 그 다음 주 월요일의 연차, 그리고 그 다음 주 월요일의 연차를 생각했다. 사실 어떤 월요일에도 연차는 없었다. 아니야, 차라리 월화수목금을 다 써버리자. 한 일주일을 잠만 자자고 생각했다. 그것도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껍데기가 출근하고 앉아 있다. 백숙을 먹자고 했으나 먹은지 세시간 만에 허기가 졌다.
그러나 퇴근하고 너를 생각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없는 너를.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너의 시간을. 한 순간도 허투루 살 수 없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 마지 않아야 하는 시간을. 사방의 벽이 말을 하지 않듯이 퇴근 후 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에게도 걸지 않아도 되고, 그냥 잠을 자도 된다. 그러나 너는 아마 혼자서 잠도 자지 못할 것이다. 그건 아마 주방의 가스불을 켜놓고 잠이 자꾸 들어버리는 일처럼 위험한 일이겠지. 누군가를 먹여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비가 오는 날 라면에 넣어 먹으려던 숙주가 아직도 거의 한 봉지가 남아 있고, 그 옆엔 자두와 참외와,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차 있음에도 다 먹지 못하고 물러버리는 것들이 있는 냉장고를 닫는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를 보고 있다. 극중 숙이씨(은희 어머니)가 삼식씨(은희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와 대사가 인상 깊다. 상대방이 말을 해주지 않아서 쌓인 오해보다 절망스러운 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제대로 물어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한 적 없다는 것. 당신이,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제대로 받아낼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묻지 않았을 것이다. 묻느니, 묻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그게 서로를 오랜 시간 망쳤고 함께 하는 날들을 지긋지긋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답을 하는 건 결국 상대방의 몫이다. 실망이나 후회도 그 다음에야 온다. 그것을 함부로 평가하고 낮춰보지 말자. 라고 생각들면서도, 어지간하게도 각이 나왔으니 묻지 않았겠지 싶기도 하다. 어떤 건 물어보려는 일조차 너무 힘드니까. 나도 못 물어 본게 많다. 그걸 마주하느니, 멀어짐을 이해해야지. 하고 물러선 마음이. 결국 이 마음도 저 마음에도 쏠린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 란에 이제 몇 개의 영화를 떠올리고 그중에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적을텐데, 이 영화를 소개하는 몇몇 영향력 있는 리뷰가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랑할 때 생기는 일', 로 시작하는 것을 볼 때, 이 영화와의 만남을 비루하게 만드는 언어의 조악함을 슬퍼한다.
내 몸보다 더 사랑한 나의 친구들. 어째서 어려움을 겪을까. 왜 네가 원했던 것이 너를 괴롭게 할까. 행복은 아주 조금이고 지겨움은 늘일까. 그걸 거둬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몇명 뿐이고, 너를 웃게 하는 사람들도 아주 조금이다. 사랑이 하지 못하는 일을 친구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물며, 사랑도 없이 너는 어떻게 긴 날들을 보내고 있나. 멀리서 몇 자의 문자로만 안녕을 묻고 달리 거둘 얼굴도 없이 다리를 식탁위에 올려두고는 자두 씨를 아무렇게나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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