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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 읽은 첫 번째 책. 별 하나도 아깝다. 그러나
매우 실망스럽다. 바우만과 돈스키스의 대담을 엮은 책인데, 둘이 왜, 언제, 무엇 때문에 이런 대담을 했는지, 그리고 이것을 책으로 왜 묶어야 했는지 연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배경에서 둘이 만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이런 대담이 끼친 영향이 뭐가 있었는지, 하다못해 언제 이뤄졌는지 해설이 전혀 없다. 옮긴이의 말도 당연히 없다. 있으나마나한 서문이 짧게 끝나고, 밑도 끝고 없이 둘이 대화를 할 뿐. 이 책에는 편집이라는게 없다. 편집이 없다는 것은 번역에서 드러난다. 원문을 그저 한글로 읽을 수 있게 바꿔 놓는 것이 번역인가? 이렇게 엉망인 문장을 읽어도 가슴이 뛰는지라 읽는 내내 억울한 마음이 가득했다. 이런 문장을 ok하고 출간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별 1개도 아까운 책이지만 이들의 대담은 굉장히 날카롭게 정치 역사 전반을 짚으며, 희망이라고는 없는 역사의 종말, 세태의 명멸에서 실존, 실존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분투한다. 악이란 대체 무엇인가, 아주 넓게 시작한 이야기가 마침내 인간만이 갖고 있는 희망,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모아지며 끝난다. 지금까지 논리 정연하게 가져왔던 절망적인 분석 끝에는 인간 심성에 대한 기대, 믿음이라는 알파가 있었다. 욕을 욕을 해도 아까운 책이지만 끝까지 다 볼 수 있었던 이유다. 끝으로 우엘벡의 소설을 꼭 읽어야겠다는, 다짐이다. 읽는 중간엔 심지어 그 책의 해설서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의 소설 철학을 많이 끌어온다.
역사는 민주주의 정치가든 권위주의 정치가든 정치가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어떤 정치적 신조나 그것에 봉사하는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는 우리 존재의 상징적 설계이자 우리가 매일 행하는 도덕적 선택이다. 인간의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물을 수 있는 권리는 자유의 한 초석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뱅 가톨릭 대학의 역사학 교수 미셸 뒤물랭이 역사가와 재판관의 역할과 기능을 모두 떠맡으려는 정치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역사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놔두어라." 59
비트켄슈타인의 지적에 따르면 아무리 많은 사람의 고통도, 심지어 인류 전체의 고통도 인류의 한 성원이 겪는 고통보다 결코 더 클 수 없다. 더 쓰라리거나 심각하거나 가혹할 수 없다. 이것은 도덕=부도덕 축의 한쪽 극단이다. 75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굳건한 토대를 요구하는 현재성의 허약함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변화를 고려할 때마다 우리는 바람과 두려움 사이에서, 기대와 불확실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불확실은 위험을 의미한다.
멜루치를 한 번 더 인용하자면 "우리는 더 이상 집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동화에 나오는 아기 돼지 삼형제처럼 집을 짓고 또 지으라는 요청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 우리는 달팽이처럼 늘 집을 등에 지고 다녀야 한다." 79
원래 '불안정'이란 용어는 군주나 귀족의 부엌 주변을 얼씬거리던 다수의 식객이나 기식자가 처한 곤궁한 처지와 생활 경험을 대충 얼버무리는 개념이었다. 그들의 생계는 군주, 장원 영주, 그들처럼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좌우되었다. 식객은 그들의 주인이나 은인에게 아첨과 오락거리를 제공해야 할 빚을 지고 있었다. 반면에 그들의 주인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오늘날 존재하는 그들의 후계자들과 달리 이름과 고정된 주소가 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후에 이 두가지를 잃어버렸다.(또는 이 두 가지로부터 해방되었다?) 오늘날의 프레카리아트가 이따금 곁에 앉도록 허용되는 지극히 덧없고 기동성 있는 식탁의 소유자들은 '노동시장', '경제적 호황과 불황의 세기' '세계적인 세력들'같은 추상적인 이름으로 요약되어 불린다. 119
이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한 인간이 지닌 모든 종류의 비밀을 빼앗을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공학적 세계의 풍조 속에서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한 길이 마련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고로 우리는 해야만 한다 우리가 다른 인간에 관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또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근대 세계와 관련되어 있는 한 가장 나쁜 종류의 악몽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선택이 자유를 정의한다고 믿었다. 서둘러 덧붙이자면 특히 오늘날에는 인간 존재의 불가해성과 인간 사생활의 불가침성이라는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 자유를 정의한다. 139
따라서 미셀 우엘벡이 근대의 이러한 내적 갈등을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인간학의 충돌로 기술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 따르면 내세적인 한쪽은 먼 이상을 지향하면서 인간의 삶과 감수성을 특징으로 근대적인 영역 전반에 걸쳐 그들이 신봉하는 이상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려하는 반면에, 현세적인 다른 한쪽은 삶과 정체성의 더 높고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가식을 부리지 않으면서 공공연하게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지향한다.
첫 번째 집단은 유서 깊고 오래된 전통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도 근대적인 권력의 언어를 말한다는 점에서, 천년이나 된 집단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현재의 배우로서 처신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두 번째 집단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을 현재의 목소리로 내세우려고 애쓰지만 실제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라는 오래된 관념을 지지하는 발언들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뿌리 깊이 상호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두 인간학의 다툼은 근대의 근본적인 긴장관계를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164
과거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공포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예사 지금이나 앞으로나) 무지이다. 이것은 미래에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떤 종류의 불행이 어디에서 닥칠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힐지 등에 대한 무지이다. 둘째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무기력이다. 이것은 불행이 닥쳤을 때 그것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는 의구심이다. 셋째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앞의 두 이유에서 파생하는 굴욕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조차 제대로 하지 안했다는 불행에 따른 손상의 많은 부분인 신호를 제때 탐지하지 못한 우리 자신의 부주의, 지나친 꾸물거림, 게으름, 의지 부족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의 자존심과 자신감이 입게 되는 상처이다. 174
무심한 소비, 관례화된 사회적 행위, 도덕적 마비의 시대에 페이스북 같은 새로운 사회 연결망은 어쩌면 당신도 주목받을지 모른다는 기대 속에 사생활의 단편을 과시하는데 이용된다. 수백 또는 수천 명의 가상 '친구'를 상대로 당신의 일, 성공, 가족 등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개인사진이나 가족사진을 게시하면서 당신의 사생활을 열심히 드러내는 것은 오늘날 공론장의효 대체물이 되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유동적인 공론장이 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의 무의미감과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주위의 무관심, 살을 에는 듯한 인지적 고요, 경보를 남발하는 사설과 선정주의적인 기사 제목, 광고 구호, 세계적 규모의 음모나 세계 종말에 관한 선언 등등에 퍼져 있는 도덕적 공허 등을 극복하려 애쓰는 기술시대 인간의(맬컴 머거리지의 말을 빌리자면) '심장의 외침'이다. 이것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개인이 자기 자신의 공간을 찾으려는, 물리적이 아니라면 가상적으로라도 자신을 보호해줄 공간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이렇게 볼 때 페이스북 현상은 이 세계에서 자신의 비존재와 불참에 맞선 투쟁을 대변한다. 194
즉 카네티가 말한 것처럼 "군중 속에서 개인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느낌을 받는다" 개인은 자신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된다고 느낀다. 개인 자신이, 보잘것 없는 단독자가 이제 다수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은 거울의 방이 더 제한되고 덜 효과적인 방식으로나마 재현하려 하는 인상이기도 하다. 205
우엘벡의 다니엘과 그의 사랑하는 개 폭스가 둘의 뒤이은 환생체들과 함께 이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즉 지구상의 마지막 개인들이 사람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들을 사랑한다. 때문에 사람들뿐만 아니라 개들도 재생된다. 개가 주인의 발 옆에서 세상을 떠날 때, 주인은 이 개가 떠나면 또 다른 개가 올 것이며 그 개도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아니라 당신이 그동안 익숙해졌고 쾌락을 얻었던 어떤 것이 또 다른 생명이 담긴 소포로 대체될 것이라는 깨달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파우스트적 영혼의 진수에 다가간다. ....
불멸에 대한 추구는 무한한 지식과 무한한 사랑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관점에서 정의된 똑같은 삶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 350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빼고는 어떤 것에 대한 책임이라는 기름투성이 검댕을 모두 씻어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353
(353페이지 전체는 두 번을 읽어도 좋다)
당신이 사랑하는 여성이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 가장 아름다운 여성은 그녀의 모습이 아직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지 않은 여성, 당신이 군중 속에서 미처 알아보지 못한 여성, 아직 당신을 까무러치게 만들지 않은 상상 속의 여성이 아니다. 당신은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없다. 만약 당신이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신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신의 피조물인 쪽은 우리이다. 당신은 오직 당신 자신의 글이나 당신 자신의 창조물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신은 우리 안에 공동체와 사회성의 힘으로서 존재한다. 사랑과 충실함은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언어이다.
우리는 다른사람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본래의 모습, 자유, 불가침성을 파괴하고 나아가 그와 우리의 관계를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264
타자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옳지 못하고 위험하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오직 다른 사람과 함께,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의 관찰과 참여 속에서, 다시 말해 사랑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
현명한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참여 없이는 자기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내길 의도적으로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당신은 당신 안에서 머지않아 괴물을 발견 할 것이디 때문이다. 364
만약 당신이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신을 알 수 있다고 믿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신의 피조물인 쪽은 우리이다. 당신은 오직 당신 자신의 글이나 당신 자신의 창조물만을 알 수 있다.
타자에 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옳지 못하고 위험하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오직 다른 사람과 함께,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의 관찰과 참여 속에서, 다시 말해 사랑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의미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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