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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을'의 생태-'살아져'와 '사라져'에 대하여
'리을'
언니네 이발관의 노래 '가장 보통의 존재' 후렴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랑했었나요 살아 있나요~♪ 잊어버릴까 얼마만에♪..." 노래를 안다면 한 번 들어보자. 노래에 맞춰 부르다 보면 어떤 발음이 미끄러지는 순간이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발음을 잡을 새도 없이 혀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노래를 꺼도 한 동안 미끄럽게 남아있는 발음, 바로 '리을'이다.
'사랑했었나요'에 이어져 나오는 '살아 있나요'는 '사랑'이 '살아'로 변하는 순간을 잡아낸다. 그래서 사랑은, '살아있어' 라는 명령의 말을 간곡히 하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너 거기 있어 달라는 부드러운 요청. 그러니 사랑하고, 살아야 하고, 또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살아있음'과 관계한다. 오래전 적었던 노트를 꺼냈던 것은 전석순의 단편 「사라지다」가 또 다른 '리을'의 변주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져'와 '사라져'다. 묘한 것은 이 둘이 한 몸이라는 것이다. 살아있음은 두 개로 갈라져 뒤편을 갖고 있었다. '살아져'와 '사라져'. 엄마가 말했던 [그래도 다 살아져]를 체념이나 달관의 말로 들어서는 곤란하다. '살아져'는 피동의 외피를 쓰고 있는 씩씩한 능동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아져'의 뒤편인 '사라져'가 보장한다. 그것은 누구도 아닌 내가 '사라지'는 일이다.
엄마를 어떻게 모실까
소설은 '엄마를 어떻게 모실 것인가'에 대한 언니와 준수, 그리고 나 삼남매의 토론으로 시작한다. '엄마를 어떻게 모실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소설 통틀어 두 번 나오는데, '두 번'이라는 숫자는 이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최대치다. 돌아가신 엄마를 모시는 것과 살아계신 엄마를 모시는 일. 엄마에 대해서 가장 오래 고민하는 시간은 이 '두 번' 에 지나지 않는다. 이 두 번이 너무나 모자란 횟수인 것은, 엄마를 '엄마'라는 호칭과 분리해 '그녀'로 이해하기 좁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삼남매는 엄마를 '그녀'로 이해하기 전에 엄마를 보냈다.
이와 함께 소설은 사진기자인 내가 오일장을 촬영하는 다른 이야기와 엮인다. '나'는 선배와 함께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찍는다. 내가 찍으러 나가기 전에 선배는 우선 [너 먼저.] 하며 셔터를 누르려 한다. [예전의 나도 사라졌고, 지금의 너도 사라질거야.] 선배는 환한 인상과 다른 말을 잇는다. 죽음을 보고 온 사람처럼 글자의 뒤편에만 강하게 애착한다. 그에게는 마침 "오늘을 마지막으로 사라질 오일장"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곧 치워질 것으로 가득하다.
엄마가 살아졌다, 사라졌다.
토론은 계속 된다. 언니는 아빠 덕분에 고생했던 엄마, 불쌍한 엄마, [죽어서도 부부여야 하는 거니?] 소리를 높인다. 그녀는 엄마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따로 모실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준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빠와 함께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함께 모시자고 말한다. 준수는 엄마가 사오는 물건은 늘 두 개이지 않았느냐, 하필이면 돌아가신 장소가 모든 동물이 쌍쌍으로 모여있는 동물원이었겠느냐며 이유를 찾는다. 그리고 엄마를 모시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내는 언니와 준수와는 달리 '나'는 그들의 의견을 가만히 듣는다. 이야기를 조율하고 싶지만 마땅히 할 말이 없다. 나는 사라지는 것-살아지는 것 중 어느편에 엄마를 세워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엄마가 했던 말, [그래도 다 살아져]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얼핏 웃음도 나오는 준수의 말을 듣다보면 서글퍼진다. 본래 하나의 물음을 두 개로 쪼개고 그에 맞는 답을 힘겹게 찾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의견을 내거나 수렴하지 못하는 이유는 또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으로 보이는) 선배가 '살아지는 것-사라지는 것' 의 한 몸인 물음에서 온통 한 쪽만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에 대해 사진을 찍자는 말이 그렇다. 그것이 동시에 '살아있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나는 오일장을 돌면서 사라지는 것을 선별해 찍지만 나중에는 아무것이나 찍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라지는 것이 살아지는 것으로 몸을 트는 순간이다. 벌어졌던 두 개의 몸이 하나의 앞·뒷면이 되어 나에게 도착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래서 소설 말미에 문득 던져 진 물음, [그런데 아버지는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이 좋을까?]라는 질문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자식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던 삶을 살았던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는 사라진 것일까 살았던 것일까? 돌아가실 때도 궁금하지 않았던 물음이 엄마의 죽음으로 불러졌다. 오래 떠올리 않았던 아버지의 인상을 삼남매가 생각하게 된다. 이제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했던 두 사람의 삶을 살피는 것으로 돌아간다. 엄마와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엄마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잘못 된 질문에는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를 쪼개 두 개로 묻는다. 엄마의 사라짐과-살아짐을 가르는 물음이 그렇다. 그러므로 이 물음에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동시에 그렇게 될 뿐이다. 하지만 살아져-피동으로 보이는 단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는-힘찬 능동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엄마는 살았으며 엄마는 사라졌다'는 대답을 소리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다다음쯤 만남에서 합당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밍숭밍숭한 커피를 마시고 헤어진다. 돌아가는 길 마셨던 검은 물맛을 떠올리면서 목에 걸린, 그러나 만져지지 않는 '무엇'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미끄러졌으되 이상하게 남아 있는 '발음' 자리를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리을'이다. "살아져-사라져."가 보여주는 것은 삶의 시작과 끝을 오가며 움직이는 '리을'의 생태다. 경계를 자를 수 없는 유연한 움직임, 끝 없는 순환의 고리 우로보로스를 작가는 이 짧은 단편에 예리하게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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