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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선생


국경은 수평으로 된 수직
 전혀- 라는 표현은 어떤 대상을 완전히 부정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그것이 '이해'의 문제에 쓰여 무엇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때, 말 그대로 화자는 이해의 바깥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해 속에 (갇혀)있어서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것이 이해인지, 이해가 아닌지 스스로 살피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팽 선생을 읽고 느낀 점은 다음과 같다. 1 무슨 소리일까, 이해를 전혀 못하겠어. 2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이해의 한 가운데이기 때문에 이해의 여부를 살피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니까 나는 이해를 하고 있는지, 하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다. 4 수평으로 된 수직*을 걷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수평으로 된 수직'이 불가능한 것은 한 개의 차원에 한정지어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두 개 이상의 시공간을 한 번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물질적으로는 언제나 수평의 상태만 갖는다. 

다만 그곳에 있을 것
꿈과 현실도 그렇다. 물질적으로는 언제나 현실만 존재한다. 그러나 둘 사이 차분하게 유지되던 기울기가 어느날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어떨까. 꿈과 현실이 뒤섞인 팽 선생, 그곳은 구분 가능하지도, 가능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곳에 섞여서 의식을 따라가는 것이 이 책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라는 생각. 어떤 사건이나 물체는 그 바깥에서야 형태가 파악 가능하지만 그것은 대상이 온전해서 시공간과 분리될 수 있을 때만 그렇다. 구분 불가능하게 섞여 있다면, 바깥으로 나오는 것 조차 가능하지 않다. 그럴때는 다만 그곳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이해일 것이다. 그러니 갸우뚱한 고개를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현실을 기울여 꾼 꿈
도통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책을 덮는 손 안쪽에 어제의 꿈과 엊그제 꿈이 지나가고 있다. 가능하기를 바랐던 사건 몇 개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들을 차분하게 지워나간다. 어제 나는 무척이나 키득거리는 꿈을 꾸었고, 깨어나서도 웃고 있었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녹고 있는 강이나, 뒷모습을 감추며 돌아선 고양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 일 정도가 큰 웃음인 까닭이다. 그곳에 아무 상관도 없이 서늘한 뉴스가 내린다. 눈쌓인 지붕이 무너져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이 죽고, 간첩을 증명하기 위해 국가기관이 서류를 날조하는 신문을 가로질러 간다. 나는 아직 온전하다. 과연... 

볼라뇨 식의 표현을 따르자면 내가 이것을 이해해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나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바예호는 팽선생이 필요하지 않았다. 팽 선생이 필요 했던 것은 팽 선생 뿐이다. 꿈 속의 한 사람을 갈라 현실에게 한 사람을 내주는 일. 그렇게 해서 이해는 고통을 피할 수 있었고 고통은 이해를 피할 수 있었다. 지난 밤에서 넘친 웃음이 나를 깨운다. 분명히 웃고 있었는데 처음 입을 떼는 것처럼 입가가 건조하다. 현실을 기울여 꾼 꿈이다.



*나희덕의 시「국경의 기울기」에서

**나는 <딸꾹질의 본성>이라는 말을 했다. 아마 딸꾹질의 특성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자신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딸꾹질은 근육의 수축일 뿐이며, 독특한 소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면서 간헐적이고 격렬한 호흡을 유발하는 횡경막의 돌발적인 움직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바예호 씨의 딸꾹질은 환자의 육체와는 완전히 별도로 전적인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가 딸꾹질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딸꾹질이 환자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인상 깊게 본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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