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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위로가 되며 사랑에 빠져 미쳐버린 너 자신을 알려줄 텍스트는 없을 것 같다. 롤랑 바르트는 여러가지 원전을 넘나들며 사랑을 위한 처소를 마련한다. 지겹게 나오는 인물로 베르테르가 있고, 해석의 도구로 프로이트와 니체가 자주 나온다. 도서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쓰려고 했지만 보도자료가 없네.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몰라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사랑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장들은 크게 공감이 되며, 내 마음을 아는 이가 있다니... 감격하고, 그때의 내 감정을 이렇게 언어로 풀어놓은 것에 대해 감동할 것이다. 아무 장부터 읽어도 좋다.

 

아래는 좋았던 구절 발췌.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정신분석학적 전이(tranfert)에서 사람들은 항상 기다린다.-의사, 교수 또는 분석자의 연구실에서. 게다가 만약 내가 은행 창구나 비행기 탑승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한다면, 나는 이내 은행원이나 스튜어디스와 호전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중략)

따라서 기다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전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과 공유해야 하며, 또 내 욕망을 떨어뜨리거나 내 욕구를 진력나게 하려는 것처럼 자신을 내맡기는 데 시간이 걸리는 한 현존에 나는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사랑의 단상>중 기다림 부분.

:: 기다리는 것이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라니. 모르는 게 낫다는 말을 여기서 써야하는건가?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어떤 것을 밝혀내는 것이 이렇게 아프고, 또 별로고, 별로지만 그게 맞고, 어쩔 수 없고....
이마를 짚게 된다. 아이쿠.

 

 

(중략) 나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내 혼란을(그때는 이미 지나간) 감춰야 할까("좀 어떠세요")? 아니면 공격적으로 ("나빠요, 당신은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또는 열정적으로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터뜨려야 할까? 아니면 그 사람을 진력나게 하지 않으면서 내 혼란을 넌지시 슬쩍 비쳐야만 할까("좀 걱정했어요")? 내 첫번째 고뇌에다 어떤 선전 문구를 택해야 할까 하는 두번째 고뇌가 나를 사로잡는다. 

 

:: 정말이지 이렇게 구질구질한 감정을 정확하고 끈질기게 서술해 낸 인내에 박수를. 그러면서도 언어의 위엄이나 맛을 잃지 않고 다음 문장으로 위대하게 넘어간다는 점에서 다시 박수를. 

 

(중략) 다시 말해 내 감정의 지나침을 결코 말로는 하지 않을 것이다. 고뇌의 황폐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나는, 그러므로 그 고뇌가 지나가면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기에 안심할 수가 있다. 언어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특히 말하지 않는 것조차도. 내 언어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데,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나는 거짓말쟁이이지(역언법에 의해), 배우는 아니다. 내 몸은 고집 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바른 어른이다. 

 

::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정말이지 바르트는 나쁜 놈이다... 그렇게 발각된다!! 이렇게 들키는 것은 전세계 공통인가? 말로는 괜찮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몸을 들키면서 우리는 다시 수렁에 빠진다고. 

 

<사랑의 단상>중 검은 안경 부분

 

 

(중략) 그 사람은 단순한 서명(suscription)이 아닌, 보다 깊숙한 새김(inscription)에 관계된다. 그 사람은 새겨지며, 텍스트 안에 자신을 새기며, 자신의 수많은 흔적을 남긴다. 

 

<사랑의 단상>중 헌사 부분

 

 

그 사람의 페이딩은 그의 목소리 안에 담겨 있다. 목소리는 사랑하는 이의 사라짐을 떠받치고, 읽게 하며, 말하자면 완성한다. 목소리의 속성은 죽는다는 것이기에. 목소리를 만드는 것, 그것은 목소리 안에서 죽어야만 하기 때문에 내 가슴을 찢어 놓는 바로 그것이다. 마치 목소리란 즉시, 추억 외에는 결코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처럼. 

(중략)

 

(잠든 목소리, 사람이 살지 않는 목소리, 멀리서 텅 빈 운명을 확인하는 목소리.)

 

사랑하는 이의 피곤한 목소리보다 더 애절한 것은 없다. (...)세상 끝에 다다른 듯한 목소리, 차가운 물속 깊숙이 잠겨가는 목소리. 목소리는 피곤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처럼, 이제 사라지는 중이다. 피로는 무한 그 자체이다. 끝내는 것을 끝내지 않는 것. 이 간략하고도 짤막한, 너무도 드물어 퉁명스럽기조차 한 목소리. (중략)

 

(중략)

전화의 목소리는 매초마다 이만 끊을게요라고 말한다.

 

<사랑의 단상>중 페이딩 부분

 

페이딩 부분이 가장 좋았다. 목소리의 죽음과 목소리안에서 죽는 것. 사랑하는 사람의 사라짐을 떠받친다<<--- 는 부분은 다시 읽어도 황홀하고 슬프다. 

 

 

축제란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의 약속된 현존으로부터 내가 기다리는 것은 어떤 엄청난 즐거움의 총체요, 향연이다. (...) 나는 내 앞에, 나를 위해 "온갖 선의 근원을" 가지려 한다. 

 

<사랑의 단상>중 축제 부분

 

하지만 사랑의 매일이 축제일 수 없고, 매일 축제를 기획할 수 없으며, 준비할 수 없고, 우리는 그 점에 지치고 실망한다. 어째서 축제가 아닌거지?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은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는 뜻이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해독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대상 때문에 자신을 소모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행위이다. 그 사람을 하나의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만든다는 것은- 거기에 내 일생이 걸려 있는 - 곧 그를 신으로 축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의 단상>중 알 수 없는 것 부분

 

아무리 해도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 <- 말 압수

 

"죽음이란 특히 이런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것. 우리가 지각해 왔던 것으로부터의 장례." 

 

<사랑의 단상>중 대답 없음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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