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주의보-박준
호우주의보 박준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꼭 오래된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바닥을 쓸어내리는 것만 배웠다는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이 그리고 있는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가끔 책상을 기울여 모든 것을 버리고 싶다.
詩
2016. 8. 1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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