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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일주일 씩 밀려 썼다. 이건 새로 만든 습관인데, 이걸 지켜온지도 일년이 다 되었다. 하루를 그날에 쓰지 않는 것은 일곱 살 무렵부터 지켜왔던 일탈이다. 밀려가는 하루하루는 아무리 또박또박 써도 뭉게진 글씨로 남았다. 이제는 안다고 해야겠지. 그럼에도 밀린 일기쓰기를 고수했던 것은 아마도 '일기'를 쓴다는 것 보다, '밀린 일기'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주 예전의 날들을 생각나게 하고, 잊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영원히 생각하게 한다. 생각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 밀린 일기는 언제나 여름방학이고, 어머니가 곁에 계시고, 아직도 글씨 쓰는 연습을 시키는 큰 칸에 우겨넣는 한 글자다. 쓰는 순간 만큼은 별 걱정없이, 그야말로 일기만을 써야한다는 걱정만으로 있고 싶었던 건가.
밀린 일기 쓰기는 여러가지 효과가 있는데 우선 '오늘 일기'를 안써도 된다는 이상한 규칙을 매일 지킬 수 있다. 일주일 내내 일기를 밀려서는 일요일 밤에 드디어 일주일 치 일기를 쓴다는 기대감. 써야할 것이 쌓였다는 기쁨. 무엇보다, 일주일치의 일기란 잘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일기장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도 어제 부로 그만하기로 했다.
일기는 일요일-토요일-금요일 순으로 과거로 들어가는데 저번주 목요일에는 도저히 무엇도 떠올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주한 목요일은 내가 당면한 목요일이 아닌, 총체적인 목요일의 기분으로만 기억된다. 날씨가 어땠는지, 기분이 어땠는지, 무슨 일이, 기억할만 누가 있었는지 쓸 수 없었다. 나는 이제 목요일에 일기를 쓸 것이다. 목-수-화-월로 이어지는 역순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목요일에 쓰는 일기는 월요일을 놓친 기분을 알게해 줄 것이다. 나의 일기는 더 잘게 쪼개질 것이고, 매일을 써야하는 일기 본연의 것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건 일기를 찾게 되는 일기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싸워야 할 것을 보지 않고, 지나가 버린 것과 싸우는, 시늉을 하는 것을 그만 두는 일이어야 한다.
나는, 으로 시작하는 말을 길게 쓴다. 나의 팔과 손목과 목이 모두 그것을 돕게 될 것이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와야겠다.
블랑쇼 선집을 읽고 있다. 지독해서 한 권을 영원히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다른 소설들이 더 시시해 지고 있다. 지고 있다.
시시한 소설들 사이에서 나는 네가 왜 이렇게 잘 생겼는지 생각한다. 누군가 나의 애인에 대해서 묻는다면 우선 '잘 생겼고요', 라고 운을 떼고 싶다. 너는 그때마다 할 말을 잃는데, 나는 이 할말 잃음이 매우 좋다. 이제껏 누군가를 잘 생겼다고 이렇게 많이 말해본 적이 없다. 또는, 나보다 1.5배는 큰 너의 몸통, 을 둘러싼 갈비뼈의 모양을 생각하며, 너에게는 이렇게 큰 것 몸 안에 있다고, 너를 지탱하고 있다는 걸 안다고 생각한다. 몸을 이루는 장기들도 조금씩 나보다 크겠지. 간은 일을 더 많이 해야겠지. 이런 것들. 우리의 뼈는 만지면 거기있고, 부러지면 아프겠지. 진짜인 삶. 나는 매일 일기를 쓰며, 이런 것을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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