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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시간 모르게-김언,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기린과숲.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하게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세계. 내가 아무리 들어가도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킨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죽어있기 때문이다. 189쪽의 24번째 줄은 천 년후에 펼쳐도 189쪽 24번째 줄이다. 책은 형태를 갖추면서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움직이지 않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 아무리 읽어도 변하지 않는다. 변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음흉한 미소. 경주를 하기로 했는데, 달리지 않는다. 영원히.
전자책을 처음 읽는다. 행간이 변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경악, 경악, 금치 못했다. 움직이는 글자로 어지러웠다. 글자 크기에 따라 밑으로 떨어지는 글자의 수가 다르다. 원형을 알 수 없다. 책이 사진이라면, 이것은 영상이다. 행갈이가 달라지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시를 읽을 수 있다. 전자책의 특성 때문이었을까. 한 행이 한 연이다.
솔직한 감정이 그랬다. 무엇이든 처음 보면 놀라기 마련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책의 처음도 그랬겠지 싶다. 오감으로 읽히던 이야기를 오직 시각으로 감지 할 수 있는 잉크로 엮어야 했을 때의 충격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에 저런걸 누가 보냐고 했겠지. 전자책의 처음도 그랬다면, 시작이 나쁘지는 않다. 나는 책을 쥔 적도 없이 불러내서 보고 다시 꺼트린다. 메신저로 이뤄지는 하루의 조용한 대화가 그렇듯이. 창을 키면 나타나고 끄면 사라진다.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이제 일상이니까.
그렇다면 시집으로써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는 어땠을까. 아버지와, 어떤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분투하는 나로 정리하면 너무 성글려나. 우선「자화상」에서 나타난 그림은 제목을 배신하고 '아빠'다. 이때 아빠는 두 사람으로 존재하는데, '아빠가 된 나'와 '화자의 아빠'가 그것이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자화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는데, 자화상은 내가 나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나를 그린다는 핑계로 자신을 학대하는 그림이라는 생각.
'첫 줄을 읽어보면 알지 이 얼굴이 얼마나 못생긴 그림인지//가장 친한 친구들도 모르고 이웃집에 사는 개도 못 알아보는' 강렬한 조소, 낯선 것은 문장을 그림이 아니라 문장으로 그렸을 뿐이다. 이후 계속되는 '아빠가 된 나' 대한 관찰을 살펴보자. '이 표정을 네 살배기 우리 딸애는 단번에 알아 차렸지 이건 아빠//이건 못생긴 이건 집에는 없는 물건이라는 걸' 신랄하다. 집에 없는 물건이 아빠의 큰 특징이라는 걸, 그러나 이것은 '나의 특징'이 아니다. 아빠가 된 나, 네 살배기 딸애의 존재로 하여금 '되어 버린' 아빠가 짓는 표정이다.
'이건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는 걸//너도 알고 나도 아는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면//신기하게도 다시 튀어나와서 짖는다 옆집의 개처럼//대문 밖에만 나서면' 여기, 옆집의 개처럼 짖는 물건, 대문 밖에만 나서면 큰 소리를 내는 물건, 그러나 그것은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다. 슬그머니 떨어지는 한 장의 아빠, 화자의 아버지가 보이는 대목이다. 집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던 아빠의 속성을, 그 지저분한 속을 다 들어내지 않고도 두 집 안의 역사, 풍경, 냄새를 훑는다. 불안정한 고요가 흐른다. 모두 '자화상'에서 생겨난 일이다. 그렇다면 이해가 있을까. '아빠가 된 나'를 내가 이해하면서 '자신의 아빠'를 이해하게 되는. 시에서 드러나진 않지만 이것을 읽는 이에게서는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점친다.
자화상으로 슬몃 보였던 화자의 아버지는「탄생의 비밀」에서 구체화된다. 그러나 주머니를 쓰고 있어 형체는 보이지 않고 무게와 질감으로만 느껴진다.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새벽에 깨어서 들었던 이웃집의 부부싸움 소리를 들려'준다. 아마도 태내에서 들었을 소리를 꺼내 주었다는 것 같다. 그리고 후에는 '나는 잠이 오는 목소리로 시끄럽게 떠드는 옆집의 부부를 향해서//어서 주무세요. 벽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협박'하는데, 불구하고 '소리는 더 커졌다.//벽이 얇아진 것이다. 소리는 더 커졌다. 벽이 투명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급기야 '여자는 젖을 물리며 내가 태어날 날짜를 곰곰이 따져'본 것으로 끝난다. 젖을 물리며 태어날 날짜를 따져보았기 때문에 '태어날 때 눈밭에 눈이 쌓여 있었'고, '그걸 본 아버지가 한여름 날의 늦은 오후로 옮겨' 놓았다. 육개월. 빈 공백, 그래서 탄생의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것일까.
그런것은 비밀로 남겨둔다는 듯 나간다. 이해가 부족한가. 그러나 어떤 것은 다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라는 물음표만 가져도 좋지 않을까, 희한하게 교차한 시간의 모습을 감지 할 수 있다면, 혹은 '눈밭에는 눈이 내리'는 당연한 현상같은 것을 알아챌 수 있다면.
다음에 도착한 곳은, '어떤 세계'다. 그곳은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시의 첫 구절, '우리는 전혀 다른 시간과 포즈를 취한다' 김언은 짧게 쓴 시만 모았다며 바람도, 기대도 없는 시집이라고 했으나. 독자의 기대는 다르다. 여기 가장 단순한 언어로 세계의 포즈를 잡아채는 모습을 부려 놓았으니. 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고층보다 더 높은//고층에서 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를//위로하고 어떻게 변명하는지 궁금하지 않다.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부분.' 왜 궁금하지 않을까. '우리는 만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한 시간씩 거리가 없어지고//우리는 드디어 엇갈렸다. 아주 멀리서.「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부분.' 바랐다는 것처럼, 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졌지만 그것은 우리의 세계가 가까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엇갈리기 위한 준비였다. 엇갈림은 만남을 전제하지 않는가? 그러나 엇갈림은 아주 멀리서 일어난다. 한 시간씩 거리가 없어지고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지 못한다.
저 이상한 세계를 대하는 김언의 태도는 엇갈리는 포즈를 그려내는 것 뿐일까. 시집 말미, 그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인생은 시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우리들의 미래를 책임질 아이 또한 완강히 거부하니까//뿌리도 없고 하늘도 없는 나무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백 년 동안의 근황」부분' 희망찬 전복. 물론 이것의 전제는 실현 '불가능'하다. '거북이처럼 명랑한 동물을 만들어낸다면//사람 대신 물건이나 팔까 싶어요. 이 시처럼//행동하지 않는 역사를 언젠가는 증명해낼 겁니다.//아무리 귀에 가까이 갖다 대어도 빗나가는 총알을. 「백 년 동안의 근황」부분.' 총성을, 저 시끄러운 폭음을 잠재울 방법은 '모든 구멍은 결국 악기가 되는 법을 거부'하는 것 이라고 예언한다. 모든 구멍, 혹시 당신의 입까지 말하는 것일까봐 두렵다. 그렇다면 그곳은 시 마저 숨통을 끊은 곳일 테니까.
소시집은 이토록 위험한 경고, 위험한 상상, 위험한 협박으로 시를 닫는다. 그렇다면 다음은? 더 무시무시한 경고일까. 지금까지「백 년 동안의 근황」이었으니, 이제 그의 '근황'을 채근해 볼 차례. 우리는 만날 시간이 없지만, 실은 아주 가까이서 만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라지는 시간 모르게 말이다. 한순간, 우리가 동일한 시간 동일한 포즈를 취했던 것을 상상해 본다. 멀어지는 것으로 사라지고, 엇갈림 밖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드디어 만났다'는 것을 기억해본다. 그것은 '눈밭에 눈이 날리는' 것처럼 당연한 풍경이었을텐데, 왜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한 시간씩 거리가 좁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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