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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신영배
계단 위에 화분
화분 밑으로 물이 흘러내려
계단이 한 칸 두 칸 세 칸 젖어 있다
화분 옆에 소녀
엉덩이 밑으로 그림자 흘러내려
계단이 비스듬히
한 칸 두 칸 세 칸 젖어 있다
해가 머리 위로 움직인다
계단 위 물 한 칸이 마른다
계단 위 그림자 한 칸이 마른다
바람이 사람처럼 지나간다
다시 한 칸 물이 마른다
다시 한 칸 그림자가 오그라든다
뒤에서 문이 열렸다 닫힌다
소리 없이 집이 열렸다 닫힌다
마지막 한 칸 물이 마른다
마지막 한 칸 소녀가 지워진다
신영배, 『기억이동장치』, 문학과지성사, 2015년, 11쪽.
어디서부터 반했게
'한 칸 두 칸 세 칸' 할 때부터.
수직의 계단을 게걸음 치듯 옆으로 한 칸씩 길게 칠해 나갈 때부터.
'엉덩이 밑으로' 흘러내리는 그림자를 그릴 때부터.
장면이 바랄 때까지.
지하의 서점이었는데
'바람이 사람처럼 지나가'는 계단이 저 앞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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