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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진행중일  때 우리는 그때까지의 일은 깡그리 잊는다. 그 직전까지는 우리 인생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행복은 오직 현재 시제로만 발생하는 감각이다. 머잖아 내 애인 곁으로, 내 크나큰 사랑에게로 돌아갈 걸 아는 가운데 혼자인 게 나는 좋았다. 14p

 

"형식이 내용보다 커선 결코 안 됩니다, 특히 이곳 폴라드에서는요. 이건 우리 역사와 관계도 있습니다. 탄압, 독일, 러시아. 우린 감정이 넘치는 사람들이고 이를 창피로 여기죠. 연극 무대에서는 감정을 조심스레 다뤄야 합니다, 감정을 흉내 내선 안 돼요." 18p

 

"남성 의식 슬하의 제도 안에 진정으로 인사이더인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할수록 기이했다. 점차 나는 '모성'이 남성 의식 슬하의 제도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여기서 남성 의식은 곧 남성 무의식이었다. 남성 무/의식은 여자이자 또한 엄마이기도 한 동반자가 자기 욕망일랑 밟아 끄고 그의 욕망을 시중들기를, 그런 뒤에 다른 온갖 사람의 욕망을 시중들기를 요했다. 26p

 

"당신 작가 아닌가요?"

이건 엄밀히 말해 솔직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가 작가란 걸 이미 알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과연 뭐가 알고 싶어 이 얘기를 꺼낸 거려나. 그가 실은 다른 걸 묻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기야 나부터가 실은 다른 걸 묻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에스컬레이터만 탔다 하면 눈물이 나는 이유를 여전히 간파할 수가 없었으니까. 36p

 

"인종 분리 정책을 믿지 않으면 감옥에도 갈 수 있는거야.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용감해야 한다, 너뿐 아니라 다른 많은 아이가 용기를 내야해. 그 아이들도 아버지나 어머니를 빼앗겼을 테니까." 42p

 

엄마와 내 머리가 맞닿으면 그건 고통이었고 또한 사랑이었다. 45p

 

학교에서 무슨 말이고 하려면 목소리를 키워야 해서 엄청 애를 먹었다. 내 목소리는 어쩐지 아주 작아져 있었고 난 작아진 성량을 키우는 법을 알지 못했다. 하루종일 방금 한 말을 반복하라는 말을 들었고 그때마다 시도는 해봤지만 한 말을 되풀이한다고 소리가 커지는 건 아니었다. 46p

 

실은 도리 대모라고 소리 내어 말할 때마다 그 두 단어의 조합이 날 거북하게 만들었다. 꼭 즈크화에 돌멩이 세 알이 들어갔는데 그대로 신고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돌멩이를 털어 내고 싶지는 않았다. 54p

 

난 에드워드 찰스 윌리엄이 쓰는 영어를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다. 영어야 우리 모두가 쓰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는 양말이 필요하다 싶으면 하인한테 소리를 질렀다. 64p

 

"5년 동안 유리잔 하나를 못 봤어. ...도자기의 느낌도 잊고 지냈어. 찻잔은 어떻게 들고 포크는 어떻게 쓰는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겠는데. " 98p

 

얼마 후에 중국인 가게 주인이 산길을 올라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면서 내게 다시 한 번, "살다 보면 간혹, 어디서 시작하느냐보다는 어디서 그만둬야 좋을지 알아야 할 때도 있기 마련이지요"라고 말했다. 130p

 

실제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웃어넘기듯이, 실제로 우리 자신을, 다른 누가 그러기도 전에 조롱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살해하도록 길러졌듯이. 이러한 생각을 누구든 견딜 수 있겠는가? 133p

 

 

데버라 리비, <알고 싶지 않은 것들>중에서

 

'다시'의 책

최근에 읽었던 책들 중 가장 충만했던 책. 거의 모든 쪽수를 접어놓았다. '다시' 읽을 수 있음이 기쁜 책은 몇 되지 않아 어떤 책이나 갖고 있는 이 속성을 대부분의 책들은 잃어버린다. 그 중 첫 페이지를 다시, 열수 있음에 감사한 책. 여자로 사는 일과 글쓰기, 두 가지가 풀어질 수 없는 실처럼 잘 땋아져 있다. 그녀의 유년에서부터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때까지 엮어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갈색의 다리, 인종분리정책, 감옥에 간 아버지, 여자, 그녀의 얼굴을 상상하며 읽었다. 잘 알수는 없었다. 그건 종종 내 얼굴인 것 같기도 했다. 이건 뭔가 이상해, 하며 주위를 예민하게 느끼면서 자신의 위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여자아이의 유년. 특히 오렌지에 대한 이야기가 압권이다. 

고통에도 층위가 있다. 가장 깊은 곳을 다녀온 자가 알려주는 윤리와 고민들. 지금 떠오르는 몇몇의 이름을 대표해서, 리베카 솔닛보다 훨씬 좋다. 그녀의 글은 탄복하게 하지만, 어지럽게 만들지만, 디디고 서 있는 바닥의 차이랄까. 글에 참 어쩔 수 없이 박혀 있고, 흉내낼 수 없는 것. 체득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데버라 리비에게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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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지 않은 것들

긴 공백기에서 돌아와 두 차례 맨부커상 최종심에 오르며 문단과 독자의 이목을 다시 사로잡은 작가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 에세이. 여성이자 작가로서 삶과 언어가 맞이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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