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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저녁의 시-진은영

_봄밤 2014. 9. 14. 00:12



고요한 저녁의 시




진은영






자 그러니 말해봐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

길가, 활짝 핀 빨간 꽃들이 자동차 엔진처럼 붕붕거리고

여자애들의 하얀 스커트가 휘날릴 때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눈부신 바람이 소란스럽다

너는 눈이 아프다


꽃들도 빨리 시들고

구름 뒤로 숨는 달과 별처럼

나무들도 어둠의 커튼으로 제 몸을 가려야 한다

오늘 밤은 푹 자야 한다

집들도 창문도 열리지 않고

                    돌아오다 문 앞에 선 너도

네 집의 문을 두드리지 말고

그 앞에 누워라

달려도 덮고

시계도 맞추지 말고.

끝없이 되풀이될 소란함과 분쟁을 만드시느라

일찍 잠자리에 든

신의 곤한 호흡 속에서 이 거대한 정적


창세기의 첫 일요일 저녁처럼


침묵에서 나온 것들은 모두 침묵으로 돌아간다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자 그러니 말해봐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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