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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네, 모든 것들-김소연

_봄밤 2014. 2. 25. 13:08



가지 않네, 모든 것들*



김소연




지난한 종이들 너무 많아라

정든 세상, 지루했던 스무 살들이여 잘 가거라


공터에 나와서 그대와 나

어두운 그림자처럼 우두커니 서서

식는 불꽃 바라보고 있다

나무 막대로 한 번 뒤적일 때마다

작은 불꽃들 위로 위로 솟는다

그대 옛여인과 내 옛남자의 사진

한데 섞여 재가 되고 있다

수많은 한숨과 적절한 외로움의 나날들

그대 일기장과 내 일기장

몇 권의 노트로 요약되는 우리의, 그렇게

무관했던 세월들

한데 섞여 재 될 수 있으니

뼈아프게 행복하여라


나는 석유 붓고 그대 성냥을 긋고

저 지리한 편지들과

시효 지난 약속들 다 타는 동안


부디 그대여

저 번 곳으로 날아가보렴, 그대 여자가 살던

그 동네로, 그대 외로운 수음의 날들이 견뎌낸

그 옛집으로 날아가렴, 훠이훠이 그렇게

그곳에 마음 두고 몸만 오렴

저걸 봐, 정발산 저쪽으로 쓰러지는 저 해를,

마지막처럼 자기의 빛을

온 마음으로 산란시키는 저것을

그러나 

내일 또 반복되는 저 석양을


그대는 다 타버린 우리의, 그러나 각자의

내력을 움켜쥐며

아, 따뜻하다

하며 웃네

너무 다르게 살아왔어도

거기서 거기인, 그렇고 그런

짧은 청춘의 흔적들 이제 한 줌 재가 되었다

새카매진 손 마주잡고

우리 현관문을 연다


그대와 나, 두 켤레의 신발이

현관에 남는다







*함성호의 詩 「오지 않네, 모든 것들」 에 답하다.



김소연, 『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사, 1996.







그곳에 마음 두고 몸만 오렴


아, 따뜻하다

하며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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