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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네, 모든 것들*
김소연
지난한 종이들 너무 많아라
정든 세상, 지루했던 스무 살들이여 잘 가거라
공터에 나와서 그대와 나
어두운 그림자처럼 우두커니 서서
식는 불꽃 바라보고 있다
나무 막대로 한 번 뒤적일 때마다
작은 불꽃들 위로 위로 솟는다
그대 옛여인과 내 옛남자의 사진
한데 섞여 재가 되고 있다
수많은 한숨과 적절한 외로움의 나날들
그대 일기장과 내 일기장
몇 권의 노트로 요약되는 우리의, 그렇게
무관했던 세월들
한데 섞여 재 될 수 있으니
뼈아프게 행복하여라
나는 석유 붓고 그대 성냥을 긋고
저 지리한 편지들과
시효 지난 약속들 다 타는 동안
부디 그대여
저 번 곳으로 날아가보렴, 그대 여자가 살던
그 동네로, 그대 외로운 수음의 날들이 견뎌낸
그 옛집으로 날아가렴, 훠이훠이 그렇게
그곳에 마음 두고 몸만 오렴
저걸 봐, 정발산 저쪽으로 쓰러지는 저 해를,
마지막처럼 자기의 빛을
온 마음으로 산란시키는 저것을
그러나
내일 또 반복되는 저 석양을
그대는 다 타버린 우리의, 그러나 각자의
내력을 움켜쥐며
아, 따뜻하다
하며 웃네
너무 다르게 살아왔어도
거기서 거기인, 그렇고 그런
짧은 청춘의 흔적들 이제 한 줌 재가 되었다
새카매진 손 마주잡고
우리 현관문을 연다
그대와 나, 두 켤레의 신발이
현관에 남는다
*함성호의 詩 「오지 않네, 모든 것들」 에 답하다.
김소연, 『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사, 1996.
그곳에 마음 두고 몸만 오렴
아, 따뜻하다
하며 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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