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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송재학
이사씨(異史氏)*가 말한다. 모년 모월 송생은 만
복사 스님과 주사위 판을 벌렸는데 노름이야 도깨비
살림이라지만 스님과 송생은 서로 종잣돈과 뒷돈을
앞장세워 시비를 가렸는데, 과연 스님을 아슬하게
이겨 목숨을 부지한 송 아무개는 그날 억지로 경을
한 권 받아 유심히 살폈으니, 낡고 희미하지만 문장
이 맑아 세상의 책이 아닌 듯했다 두근거리며 진동
걸음으로 경을 숨겨 돌아온 서생, 수백 번 읽고 외우
고 찢고 태우며 허공의 소리가 들린 후에야 고향 땅
아무개산 츠렁바위 인근에 가묘를 썼으니 마음은 걷
잡을 수 없이 심란했더라
하 수상한 세월 지나 누군가 만복지보를 찾아 봉
분을 파헤치니, 책은 먼지처럼 바스러져도 보물은
고스란히 있을지니, 파묘자는 먼저 황장목관에서 깨
끗하면서도 무늬 없는 상자를 볼 수 있을 터, 허나
상자를 열어보면 다시 상자이다 또다시 열어보면 고
대로 처음 본 민무늬이니 인내심으로 다시 열어볼
일이다 또다시 상자와 상자라면 잠깐, 찬 서리에 홍
낭자 신세인 파묘자는 화증이 솟아도 알아야겠지,
송 아무개의 일생 또한 텅 빈 것들의 악연이었다고,
그의 허묘와 생애를 가득 채운 건 의심투성이었다고,
파묘자는 송 아무개가 그 경을 수백 번 고쳐 읽고 골
몰했지만 의심을 의문으로만 바꾸었다는 걸 알았어
야 했는데, 아마 「만복사저포기」 이후 「송생전(宋生
傳)」의 이모저모도 그러했을 거라, 문득 여기까지 궁
리하다 다시 곰곰 앞뒤로 따져보니 쥐뿔도 남기지
않았던 선문답 같은 송 아무개가 분하여 파묘자는
기어이 서생의 주검을 찾아 해골의 눈알이라도 샅샅
이 들여다보고 싶을 터, 경북 영천의 낙백서생 송 아
무개가 읽은 경의 마지막 쪽은 죽은 뒤에도 눈 부릅
뜨는 개안술에 대한 너덜너덜한 방법론이었겠다
*포송령 기담집 『요재지이』의 화자.
송재학, 『검은색』, 문학과지성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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