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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이병률
축구를 응원하러 대인파가 모인 시청 앞 광장
보기에도 충분히 허름한 부부가
군중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실명한 듯 한쪽 눈이 패었고
아내의 꿰맨 가방을 메고는 앞서 느리게 걷는 남자는
야윈 몸이 작아도 너무 작아 바스라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바깥을 서성이다 못해 밀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눈을 떼기 싫었던 건
나란히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였다
그때 사내가 몸을 돌려 아내에게 뭐라 귀엣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중심에서 출렁 함성이 터지는 바람에 아내는 알
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들었다
섬에 가자고 했다 잘못 들었다 집에 가자고 했다
생활이 말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아니 생활을 넘지 못
해 미안하다
앉자고 했다 잘못 들었다 웃자고 했다
바다를 건너자 했다 아니 다리를 건너자고 들었다
그래도 살자고 했다 아니 삼키자고 했다
고래처럼 모인 마음들이 파도처럼 잘못 왔다가 되돌아
가는
개 같은 밤
탄식에게
이병률
네가, 내 간을 뜯어가듯 조금이었음 한다
이빨의 기운을 믿어 나를 물어도 내 속은 후려치지 않
았음 한다
삼라만상이 내 말을 믿었음 한다
잘못했으니 다 내 잘못이었으니, 산 늪에 몸을 들여 서
러워지고 늪이 다 마르고 몸 갈라져도, 구더기 복받쳐나
오는 내 심장을 벌려 얼굴을 묻은 채로 안 볼 터이니
한장의 이파리처럼 뒤집히는 이 소요, 아주 가끔이었
음한다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6.
시를 모른다는 친구는 내가 오랫동안 몰랐던 구절을 알려주었다. 나는 부끄러웠고, 얼굴이 빨개질만큼 좋았다. 그 친구 이름은 불가사리. 한 오년 속초 바다에서 살다가 뭍으로 올라와 크게 메말랐다. 그런대로 잘 걸어 다닌다. 성게같은걸 좋아한다고 들었다. 가끔 랍스터를 해먹는다는 앞뒤 안맞는 이야기도 놓자. 그는 가끔 친구 말미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름다웠다고 읊조린다. 헤어진지도 좀 된 것 같다.
내가 건네는 시는 여기까지. 더 있겠으나 타이핑을 하면서도 좋을 시를 고르기 때문에 아주 길거나 짧은 건 올리지 않는다. 이병률은 세 권의 시집을 냈고, 차례로 <바람의 사생활>(2006), <찬란>(2010), <눈사람 여관>(2013)이다. 나는 <바람의 사생활>을 제일로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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