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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를 '나'와 '나'로 읽는다
짐을 옮기다가 컴퓨터가 발을 덮으며 쓰러졌다. 컴퓨터 본체는 꽤 무거웠기 때문에 나는 짧은 소리를 내며 앉았다. 컴퓨터를 옆으로 치우고 발을 살폈다. 아픈 이유를 무게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본체는 무거우면서 모서리가 반듯했기 때문에 발목을 밀었다. 나는 눌린 동시에 찍힌 셈이었다. 밀린 살은 곧 붉어졌다. 아프다는 생각은 '아깝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나갔네. 피가 나지 않는 자리에 과산화수소를 부었다. 후시딘을 찾아 바르고 다시 방에 들어가 짐을 옮겼다. 어떤 식으로 아픔을 기억할지는 발목이 아는 일이다. 나는 흉이 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발목을 바라보는 일을 그만했다.
왼쪽 뒷목에는 대상포진이 눈치를 보면서 올라오고 있다. 나 역시 그의 눈치를 보면서 약을 바르고 컨디션을 체크한다. 하루가 지나고 오른 뒷목에도 대상포진이 기미를 보였다. 성나지는 않았지만 오돌도돌하게 잡혀서 곤란했다. 다름 날은 앞 목으로도 왔다. 마음을 며칠 놓기로 했다. 아프라고 하면 아플 수밖에 없다. 시간은 함께 간다. 아프라고 오는 것과, 앓는 것은 아픈 순간 함께다. 내게는 방법이 없고 멀리서 온 비가 방충망에 걸리기 시작했다. 곧 저 작은 네모를 뚫고 이 앞으로도 떨어질 것이다. 오래된 매미는 울기를 멈추고 방충망 낮은 곳에 매달렸다. 매미의 배가 하얗다, 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눈을 돌린다.
방을 하루 종일 정리하면서 나는 꽤 많은 것을 발굴했다. 꽤나 쓸모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억은 유치원때부터 거슬러간다. 그때 쓰던 명찰부터 시작해서 일기장은 말할 것도 없고 주고 의외로 '받은'편지가 한 상자였다. 이렇게 많이 받았었나. 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많이 썼었나, 생각하지만 기억은 별로 없다. 카톡이 학창시절에 없었던 것을 기뻐했다. 걔중에는 내가 쓴 편지도 있다. 마음을 고백하는 편지가 많았다. 편지를 보내지 않는 버릇은 그때부터였는지. 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었다. 몇 줄도 읽히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없다. 이 편지도 다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보낸 것들은 마땅히 자리를 잃었기를. 예전의 말과 예전의 웃음은 그때로 충분하다. 다만 나는 아홉 살의 내가 모았던 것을 모아놓고 열다섯 살의 내가 했던 갈무리를 마땅히 보존 할 뿐이다. 이제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물을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나는 그런 일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서른 살과 마흔 살의 나는 또 지금의 나를 두고 고민 할 것이다. 이런 걸 어쩌자고 모아놨니 불평도 섞어가면서. 그러나 멋쩍게 웃으면서, 이런 걸 다. 혼잣말도 하면서. 기억하건데 아홉 살의 나는 그런 걸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저 그때 소중해서 모아놓았을 뿐이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나였던 어제를 넣는다. 안정감 있는 네모난 박스, 고양이가 자신을 그 안에 들이미는 것은 이전의 나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부디'라는 노래를 듣고 너무 좋아서 기타로 연습했다. 비슷한 목소리를 낼 줄 알았지만 녹음해 본 목소리는 아주 달랐다. 처음 들었을 때 잠시 그대를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곧 침착하게 나는 그대를 나로 치환했다. 그대와 나를 나와 나로 듣는 것은 내가 이렇게 약하고 편협하기 때문이다. 작고 불쌍하기 때문이다. 포진이 목을 훑고 비가 좀 더 내리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예쁘게 웃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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