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풍경의 맛

아무곳에도 없는 맛

_봄밤 2014. 8. 17. 22:20






달력의 광복절이 낀 주말에는 한 달 전부터 '어디갈까?'라는 물음표가 적혀있었다. 때가 지남에 따라 '국박?', '남산?' 같은 것이 댓글처럼 추가 되었지만 물음표가 있기는 여전했다. 마땅한 대답은 아니었는지, 가타부타 구체적인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곳을 생각하는 것은 또 게을러서 별 생각이 없이 칠월을 지나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 석이가 자전거를 타러간다고 했나, 잘 다녀와라 하는 마음이 한차례 오갔던 것 같다. 짜식, 했던 게 팔월 초에 다시 기억나서 거기, 나도 가자고 했다. 석이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일단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누나의 갑작스런 출현이 좀 뜬금없었을 테고 혹은 애인이거나 또는 애인과 어디 좋은데 가지 않고서 동생과 자전거라니...하는 마음도 없잖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혹일 뿐이고, 누나와 자전거 여행이라니 좀 신나는 것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어디를 같이 놀러간 적은 없었으니까. 아마 처음이라면 첨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쯤에서 둘째의 출현도 얘기 해야겠지만 그 애의 의중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여행가기 전날까지도 그랬다. 자전거에서 일단 심드렁할 것이었고, 그보다 더 여행에 호감이 있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들떠서 어디 간다! 하면 다녀와 하는 식이었으니까. 떠나기 전날 둘째와 나의 대화는 입에 대기만 하면 툭툭 끊어지는 쌀국수처럼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그 와중에 '둘만 놀러가고'라는 말은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는 듯 마음을 담은 데가 있어서 '다음엔 편한 곳으로 셋이 가자'라고 나는 마음을 나보다 더 내서 말했다. '자전거는 무리니까'라는 대답에도 서운함이 감춰진 듯해서 다음은 꼭 셋이 가야지, 생각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 코스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이 있었다. 나는 그냥 도로로 달리기를 원했고, 석이는 사대강 종주코스를 달리기를 원했다. 지난여름, 지지난 여름, 때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달려 도장을 받은 것이 꽤 되었고 집에는 무슨 메달 같은 것도 날아 왔었다. 그 애도 안다. 사대강 자전거길이란 그 돈 쳐들어 강을 조사놓고 할게 없어서 '그거라도' 간신히 해놓은 길이라는 걸.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보지 않을 그곳을 억지로 닦아 놓은 거란 걸. 그러나 이왕 시작 한 거 다 해보고 싶다라는 말에 기울었다. 자전거 도로니까 일단 안전(?)하고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것도 한 몫 했다. 버스로 갈 것이냐 기차로 갈 것이냐 시작은 어디부터 할 것인가, 하는 세부적인 고민이 많았지만 역시 가기 전날 얘기했다. 이렇게 준비 없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나는 장갑도 없었다.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털장갑과 하얀 장갑(기사님 장갑)을 꺼내 놓고 골똘했다. 석이는 온 집안을 다 뒤져서 두 벌의 목장갑을 찾았다.


우리가 가는 길은 영산강 코스로, 담양에서 목포까지 약 133km의 여정이다. 담양댐부터 시작해서 7개의 도장을 받으면 되는데 8시간 50분정도 걸린다고 한다. 넉넉하게(?) 12일로 잡았다. 들어보니 석이는 어제 엊그제 강행군의 연속이었고, 그 전에 삼일은 연속 약줄을 잡아 어깨가 빠질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누나가 얼마나 자전거를 타는지도 모르겠고, 게다가 저 미니벨로라니 한숨이 나오는 지경보름 아침 6시 10차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일어나보니 잠이 덜 깼고그러나 누나는 버스에서도 잘만 잤다. 내려서 바로 담양 가는 버스를 타는데, 남도에 대한 지리적인 개념이 이렇게 없어서야. 담양과 함양을 헷갈려 함양가는 표를 달라고 했다가 큰일 날 뻔 했다.

 

담양 터미널에 내리니 풍경이 어땠더라. 아담한 터미널이었다. 시작을 앞두고 화이팅이라거나 힘내자거나 그런 몸짓은 아무도 없었다. 담담하게 자전거에 올랐고 그런 조용함과 어울리는 곳이었다. 헬맷을 쓰고 몇 년 만이라고 해도 좋을 자전거 페달을 굴렸다. 담양댐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있다가 다시 만날 길을 거슬러 가는 셈이어서 완전한 시작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메타세콰이어를 금방 만났다. 과연 큰 나무들이 도로 양옆에 줄지어 있다. 녹색이 빛마다 달랐다. 조금 더 가면 아주 메타세콰이어 길이라고 나오는데, 그 길은 도로 옆에 있어서 자동차와 자전거는 지나갈 수 없는데다가 길을 지나는데 입장료도 있다. 그곳을 지나면 죽녹원 표지판이 나온다. 아담한 샛길을 따라가면 금방이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아홉시. 대나무 숲이 울울했다. 자전거를 옆에 묶어두고 올라가 보니 대나무도 종류에 따라 이름이 달랐다. 개미굴처럼 나 있는 죽녹원의 모든 길은 가볼 수 없었고, 몇 군데만 정해서 돌았다. 바닥에 내린 댓잎이 색깔별로 달랐다. 아주 녹색인 것도 있었고 검은 색에 가까운 녹색, 색이 바란 연두색, 바라서 부서질 것 같아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색도 있었다.

 

길 어디 팔각정에는 전날 비가 왔는지 바닥이 팔각으로 패어 있었었고 지붕 위에는 댓잎이 수북했다그런걸 보는 게 좋았다저것좀 보라, 신기하네 하는 대화도 있었다. 대나무 뿌리가 드러난 걸 보기도 했다. 촘촘하고 가늘게 뻗어나는 뿌리는 무슨 고통을 형상한 것처럼 괴로워보였다. 뿌리가 꽃처럼 아름답지 않고 꽃이 뿌리처럼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주 작고 보기 쉬운데서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떠올리기도 어렵고 따라서는 궁금해 하는 것조차 어려운  뿌리, 그걸 안아주는 일은 더 쉽지 않겠지후에 죽녹원에 가는 사람은 드러난 뿌리에 흙을 덮어주었으면 한다.

 

길 중간쯤 댓잎 아이스크림(정확한 이름은 아니다)을 파는 둥금 돔으로 연결되는 곳이 나온다. 대나무잎 색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이었다. 삼삼오오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댓잎향이 함유되었을 것이라는 냉철함을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들어가 보니 지하로 내려가야 댓잎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었고, 1층에는 죽녹원과 전혀 상관없는 복분자맛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비록 들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혼자 분홍분홍한 색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지하까지 내려가는 수고로움과 복분자맛 아이스크림의 두 배인 것까지 감안해 저 대나무잎 색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것인가. 아니지, 오히려 지층에, 돈 두 배의 수고로움은 죽녹원이라는 서사를 완성시키는데 꼭 필요한 몇 개의 난관이 되었던 것인가!

 

비운의 복분자맛 아이스크림 여기까지와서 복분자맛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은 다 된 서사에 코를 빠트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왜인지 정확히 몰라도 왠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복분자맛 아이스크림에 대한 외면은 당연했다. 그것을 간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녹색의 대열에 이탈해 분홍을 선택했다. 향은 틀림없는 복분자었다. 아침 아홉시 반, 죽녹원에서 수박바나 바밤바, 누가바와 다름없는 복분자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목이 이렇게 달달하고 시원하게 축여지는 것을 자랑삼았으나, 후에 이야기할 것에서 자랑 되지 않을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강력한 서사의 힘이라니자전거를 끌고 내려와 댐으로 향했다. 우리의 여행이 각본대로 맞춰진 대나무잎맛 아이스크림이 되지 않을진대, 복분자맛 아이스크림처럼 얼토당토 하는 일은 없도록 과자까지 모두 먹어 치운 후였다. 이 여행은 아무곳에도 없는 맛일테다. 





<2편에서 계속>




'풍경의 맛'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양계 연대기_북콘서트  (0) 2014.08.21
이 길의 특징은 '아무것도 읎다'  (0) 2014.08.18
혹성탈출  (0) 2014.08.08
매미의 배  (0) 2014.08.01
Palestinian Gardener-팔레스타인 정원사  (0) 2014.07.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