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당신을붙잡을 수 있을텐데
천둥소리만 들리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준다면 나는 머무를 겁니다
만엽집의 단가中
비가 오는 날은 무엇이 좋을까. 공기를 훼방하고 거리를 막아서는 비. 비가 오는 날은 무엇이든지 조금씩 늦고, 느리고, 늦게 된다. 이유는 분명치 않아도 '비가 오니까'라는 말이 둥글게 감싸준다. 햇빛으로 단정한 거리를 잠시 단절하는 비, 비는 쉬는 곳이고 도망하기 좋은 곳이다. 열다섯 살, 유난히 비를 좋아하는 소년은 유월부터 좋다. 이곳의 비는 분명해서 '여름'이라는 장소에만 내린다. 우리에게 15살이 얼마나 까마득한 나이가 되었는지 생각하고 그 짧은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것을 안다면 비와-여름과-열다섯 살은 과연 이어지는 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렴, 열다섯이나 서른이나 그 시절이 짧기에는 매한가지다. 당신이 살고 있는, 의미를 딱히 붙이기 어려운 나이라고 해도 언젠간 '시절'이 돼버리니. 이 반짝거리는 열다섯에 빗대 지난한 시절이라고 매도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두 번 만날 수 없는 시절은 다 같이 소중하고, 반드시 그곳을 지나서야만 알 수 있다.
타카오가 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가 오는 날은 '혼자 있기 좋다'는 데 있다. 타카오는 화창한 날, 밝은 곳, 웃는 사람들로 ‘분명한 세상’에 자신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 비와 함께 조금은 흐트러진 보통 사람의 마음을 틈타 교실 밖으로 벗어난다. 잠시, '다른 내가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자유로워진다. 잘 맞춰진 책상, 분필이 또각이는 칠판을 두고 타카오는 생각이 없다. 학생이라면 따르고 배워야 할 '정규 과정'에서 벗어나 있다. '구두 제작공'이라니, 구두를 스케치하고 나무틀을 깎는 중학생의 방과 후라니. 이렇게 어린 나이에, 저렇게 멀리 내다 볼 수 있었던 걸까.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엄마는 남자친구를 따라 가출 중이고,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은 여자친구와 나가서 살 집을 구했다고 통보한다. 아버지,아버지는 타카오 유년의 기억에만 있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자, 화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엄마의 가출을 침착하게 알리고 어느때처럼 요리를 하고 형의 퇴근을 기다려 저녁을 차려 먹는다. 평범하게 흐르는 전운 가운데, 타카오의 요리 솜씨는 놀랍다. 해야 했기 때문일까.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외모와 성격에는 타키오가 '혼자'라고 느꼈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타카오는 자신이 있을 곳이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드러나지 않지만 타카오는 엄마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싶은 엄마와, 형과, 결혼으로 가정을 꾸리려는 형과 부대낀다. 타카오는 엄마와 형이 직접 마음을 내비치지는 않아도 모두 느끼고 있는 것이다. 셋이 같이 살지만, 나는 혼자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학비도 벌어야 한다. 어서 직업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 혹은 다짐. 그런데 왜 구두인가. 타카오가 구두에 마음 하는 것은 아직'가족'이 있던 시절, 자신이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기억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셋이서 엄마에게 선물한 아름다운 하이힐. 타카오에게 구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이며 흐릿해지는 행복한 '나'를 환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두를 갖지 못한다면, 타카오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밀려드는'왜'라고 물음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다시 비가 오는 날. 타카오는 지하철에 내려 도심의 공원에 간다. 그곳에는 물이 있고, 정자가 있고, 나무가 많은데 사람이 없다. 비가 오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구두를 그린다. 그리고 역시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맥주와 초콜릿을 먹는 유키노를 만나게 된다. 타카오는 열다섯 살이고, 유키노는 스물일곱 살이다. 삶의 공간이 다르고 위치가 다르고 하다못해 입고 있는 옷도 다르며, 모든 조건이 다른 그들에게 단 하나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비가 오는 날, 그 장소에 있다는 것뿐이다. 유키노에게는 그곳이 우연이었고, 타카오에게는 자신과 약속한 장소였다. 비가 오는 아침에는 이곳에 온다는 타카오 말을 듣고, 유키노도 그곳에 꼭 비가 오는 날 있게 된다.
타카오는 정원에서 자신을 조금씩 들킨다. 구두를 만들고 싶어 하고, 연구하고 있고, 가죽이 비싸고, 갖고 싶은 책이 있다는 소소한 이야기들. 시간이 흐르자, 구두를 진짜로 만들고 있으며 유키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타키오가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유키노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상한 장소에서 이상하게 존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비현실에 있는 단 한 사람. 한정된 시공에서만 말할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에 비해 유키노의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한다. 타카오는 물어보지 못하고, 유키노는 말하지 않는다.
처음 만난 날, 유키노는 만엽집의 가사를 들려주었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당신을 붙잡을 수 있을텐데"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가사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타카오는 이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풍경처럼 스쳐지나간 언젠가의 수업시간. 할아버지 선생님이 칠판 부서지는 분필로 글자를 적는다. 일본어라서 읽지 못했으나 아마도 이 가사의 구절이었을 것이다. 타카오는 창밖을 보거나 구두를 떠올리고 있다. 첫 만남에서 유키노는 자신을(고전 선생님) 충분히 알렸다고 생각했지만, 타카오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저문 장마 뒤로 예기치 못한 큰 비가 온다. 여기에서 타카오와 유키노가 자신의 '나이'를 걷어내고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여준다. 맨발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유키노의 다급함과 층계참의 어디에서 하염없이 장대비를 보고 있는 타카오의 차분함이 만나는 장면. 타카오는 더 없던 모습으로 맹렬히 자신을 지킨다. 지금까지 그가 한 행동이 상처주지 않고, 예의바르고, 안전하고, 그러니까 보통의 열다섯 살(이 아니더라도 사랑을 깨닫기 전)이라면 지켰어야 했을'정규과정'에 해당되었다면 지금의 타카오는 유키노에게 나의 진짜 마음을 변호하고 당신의 비겁과, 나약함과, 그 밖에 얇은 마음으로 겨우 감지 할 수 있었을까 말까 했던 내밀한 장면들을 모두 끄집어내 고발한다.
유키노는 어디에서 무너졌을까. 타카오가 꺼냈던 나에 모든 비겁에 대한 고발에? 아니면, 열 다섯이라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치 굳건하게 지켜냈던 타카오의 마음에? 유키노는 자신도 지키지 못하고 남도 지키지 못하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스물일곱 살이 열다섯 살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열다섯은 절대로 알 수 없을 스물일곱의 풍경뿐이었다. 그러나 그 풍경은 아무것도 아니다. 열다섯 살의 노을이 일곱시에 지듯 스물일곱 살의 일곱시에도 하늘이 그리워진다. 당신이 알지 못할 나이를 더 지냈지만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들킬까봐 유키노는 자신의 노을을 보여주지 않았다. 컴컴한 아홉시에 노을을 맞으려 했던 걸까. 그러나 비는 일시에 내려서 타카오와 유키노에게 어긋나지 않는다. 똑같이 맞고야 만다. 비는 당신이 지금 있는 만큼 내린다. 당신의 인생에 몇 개의 내가 있더라도 지금 비를 맞는 것은 오직 한 사람의 모습뿐이다.
구두는 과연 유키노에게 전해질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타카오가 구두를 만드는 것는 유키노를 자신의 힘으로 나아가게 도와주려는 이유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정물로써의 구두'가 생명을 얻어 마침내 '움직이는 것'이 되는 것을 보고 싶었던 마음도 함께 자랐다. 타카오의 꿈에 자신이 자리한 것을 유키노는 정면으로 마주 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 무너지는 것은 때론 바람직한 방향일 수 있다.
여름은 너무 짧아서어느새 매미의 울음 뚝뚝 떨어지는 밤이다. 영화는 노래와 함께 계절을 돌며 마침내 눈이 그치는 장면에 도착한다. 봄이고, 다시 장마가 시작되는 여름이 올 것이고. 한 시절, 여름을 함께 보냈던 이들도 어디론가 한 발자국은 더 가까워졌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마음가짐을 열다섯 살의 소년에게 배운다. 더불어 비를 그리는 마코토의 마음도. 사랑도, 비를 그리는 것도 내가 직접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를 보여주지 않고서 상대를 안다는 것은 무척 나쁜 일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비를 맞아본 사람이 그리는 비와, 비를 풍경으로 내리는 것만을 본 이의 그림의 차이는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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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는 과연 비가 어떻게 내리는지 아는 사람이다. 그의 세밀한 재현은 놀라다 못해 이야기에 몰입이 방해될 정도였다. 비가 내리는 수십 개의 장면 중에 어느 하나는 내가 꼭 본 그때의 모습이고, 물에 빛이 달려드는 모습들 중 어느 하나를 보지 않았던 적이 없다. 특히 아무것도 아니었을 장면, 분필 가루가 떨어지는 그 장면에서 나는 순식간에 중학생이 되었다. 혼자 남은 과학실, 와와 거리는 바깥의 소란과 조용히 부러진 분필을 모으고 뜻도 없고 의미도 없는 글씨를 그려놓는 아이.다만 분필이 칠판에 쓰여지는 모습을 사랑하는 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