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동네 친구 중에 기영이라고 있었다. 깡마른데다가 터울이 있는 형들 옷을 물려 입어 티셔츠가 항상 컸다. 뛸 때 가는 몸이 다 드러나도록 펄럭거리는 게 굉장했다. 어깨 죽지에 날개라도 붙은 것 같았고 또래보다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달려보면 비슷했다. 기영이는 윗말에 살아서 어울려 저녁도 먹고, 어른들 참에 끼어 옥수수나 막걸리를 한 입씩 먹곤 했다. 어느 날은 대청에 모여 참외와 수박을 먹었는데, 기영이는 수박을 포도와 헷갈렸다. 그것들은 여름에만 나고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른들은 웃으며 친절히 알려주었다. 기영이는 두 해 여름을 보내고 수박과 포도를 구분하게 되었다. 처음, 수박을 보고 포도라고 하던 날 나는 수박씨를 다 뱉으며 웃었다.
옆짐을 지고 으쓱하게 말하되, 나는 명사를 헷갈린 적은 없다. 수박은 수박이고 포도는 포도다. 이렇게 다른 걸 헷갈릴 수 있는지 의아해 하면서 그걸 가르쳐주는 어른과 기영이를 유심하게 살폈다. 수박은 아삭아삭하고 포도는 입속에 쏙 들어가지.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도 '간다'와 '온다'를 구분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가끔 화가 나서 꾸짖으셨지만,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더 틀렸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간다’와 ‘온다’를 마구 헷갈려도 기영이는 웃지 않았다. 기영이는 어쩔 때 음, 음, 하며 설명해 주고 싶어 했지만 설명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옛날에 내가 뱉어놓은 수박씨가 까맣게 반짝였다. 나는 가끔 그 수박씨만큼 부끄러워졌다.
하루 다섯 번이나 ‘간다’와 ‘온다’를 틀리게 말한 날 턱을 괴고 오히려 헷갈리지 않는 사람들을 걱정했다. 부모님이 알려주실 때마다 진지하게 듣는 척 했고 들었던 당시에는 금방 구분해 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틀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내 틀림이 자랑스러웠다. 이 둘은 사실 구분할 수 없는데 어른들이 시시해졌기 때문에 가르게 된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건데, 내가 이말을 구분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내가 있을 곳’과 ‘지금 있는 곳’을 헷갈렸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머릿속으로 둘 다 넣어보는 기민함을 보였지만 여전히 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학교가 바뀌는 겨울방학, 중학교 소집일이었다. 무슨 종이를 받아들고 처음 보는 얘들 사이에 있다가 버스를 기다렸다. 기영이는 버스에서 갑자기 말을 뗐다. 말야, '간다'와 '온다'는 말이야. 네가 두 곳을 함께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그게 틀린 것 같지는 않어. 그럼 고를 필요도 없는 말 같고. 기영이의 말을 듣는 순간 '너는 왜 그걸 헷갈리니'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했던 내 마음처럼 들려서 고마웠다. 그러나 중학교를 올라가는 판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감추고 무심하게 답했다. 근데 나는 더 이상 헷갈리지 않아. 우리는 집에 가고 있잖아. 기영이는 그렇지. 끄덕이며 창밖을 봤다. 내가 있던 기억을 되짚는 것조차 쉽지 않다. 내가 없었던 곳의 기억을 기억할 수 있는 힘은 얼만큼 큰 힘이 필요한지 생각한다. 할 수 있는 일인가, 기영이의 펄럭이는 옷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지 않았다'의 혐의가 짙었을 뿐이다.
_
기영이가 보고싶다.
_
아저씨, 여기 오백 하나 더요
_
내 친구중에는 기영이란 아가 없다.
_
'풍경의 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준이는 삼십만원이 필요하다 (0) | 2014.07.25 |
---|---|
언어의 정원-신카이 마코토 (0) | 2014.07.25 |
그다지 길지 않은 이야기 (0) | 2014.07.10 |
해변의 백가흠-정지돈, 오한기 (2) | 2014.07.09 |
배경은 바람이 날아간 하늘색 (0) | 2014.07.08 |
- Total
- Today
- Yesterday
- 책리뷰
- 이병률
- 상견니
- 이준규
- 서해문집
- 1월의 산책
- 정읍
-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 민구
- 배구
- 이문재
- 일상
- 문태준
- 후마니타스
- 대만
- 김소연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네모
- 열린책들
- 이장욱
- 진은영
- 궁리
- 차가운 사탕들
- 희지의 세계
- 한강
- 이영주
- 현대문학
- 뮤지컬
- 지킬앤하이드
- 피터 판과 친구들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