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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들어줘
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대화라면 상상하기 좋겠다. 애인과 당신이 있고 애인의 말과 당신의 말이 있다. 애인의 듣기와 당신의 듣기가 있고 더 많이 듣고 싶어하는 사람과 더 많이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의 욕망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위치로 설명할 수 있다. "나보다 네가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을 뿐" 무겁게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는 늘 지상 가까운 곳에 있다.
말하기는 상대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상대를 마음한다고 여기거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에 대해 암묵적인 동의가 이뤄졌을 때 일어난다. 듣기는 어떤가. 상대를 알고 싶은 마음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생긴다. 말하고-듣기는 그렇게 사랑이라는 마음의 최대한에 기댄다. 대화가 언제나 안녕이라는 인사에 머물수 없고 롤러코스터가 언제나 360도 회전틀에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듣기는 자신의 원함과 상관없이 기승전결을 따른다. 빗나가는 대답과 종종의 침묵으로 점차 원치 않게 대화는 점차 종료된다.
대화가 늙는 것을 사랑의 노화로 이를 수 있을까? 대답은 "그렇다." 대화가 삭고 떨어져 나가면 눈빛이나 손길로도 채울 수 없는 구멍이 생긴다. 때로 충돌을 피하고자 침묵으로 원치 않는 말을 가려놓지만, 그것은 원치 않는 대화를 현상하는 것과 다름 없으므로 공백이 생기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늙어가는 대화를 항상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닉과 에이미의 첫 만남에서 "에이미, 당신은 누구지?"라고 물었던 것을 기억하자. 에이미는 세가지 보기를 준다.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서 간절하게 필요한 물음이었지만, 그것이 사랑을 지루하게 만드는데 가장 필요했던 대답이기도 했다. 삼지 선답이라니, 너무 쉬웠다. 상대를 파악해서 사랑에 빠지기에는 더 없이 좋은 답안이었지만, 사랑이라는 환상을 부수기에도 더 없이 좋은 답이었다.
결혼 5년 후. 닉과 에이미 사이에는 말이 놓일 공간이 없다. 수 읽기와 집 세는 것까지 모두 마친 바둑알이 가득하다. 바둑판을 가득 채운 검고 흰 돌은 옴싹달싹 할 수 없다. 판이 끝났으므로 다른 판을 준비해야 하것만 닉은 이미 다른 여자와의 만남으로 에이미와의 대화를 종결했다. 이 둘은 결혼기념일마다 보물찾기를 통해 새로운 말을 찾아 나섰지만, 이미 서로에 대해서 알아버린 커플에게 더 이상 새로운 대화의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에 에미미는 바둑판을 밀쳐버리고, 지금까지 놓았던 바둑돌을 모두 바닥에 메꽂는다. 흐트러진 알들은 닉과 에이미를 리셋하고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게임으로 초대한다. "너만 작가인 줄 알았지" 에이미는 어메이징 에이미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십분 활용한다. 그 자신이 에이미이면서 소설의 캐릭터였음을 상기한다. 첼로 켜기를 실제로는 1년만에 그만두었지만 책 속에서는 학교 대표가 되었던 어메이징 에이미. 둘의 괴리로 어메이징 에이미를 소설속 캐릭터로 밀어내며 자신과 현명하게 분간해 왔지만 이제 에이미는 그의 부모의 펜을 물려받아 스스로 에이미를 집필한다.
에이미가 스스로 작가이자 주인공으로 움직이는 각본은 현실이라는 무서운 소스를 활용해 닉을 도저히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 자신을 소멸시키고 닉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의 손으로 완전히 파멸시키는 첫 번째 안을 파기했던 순간은 극적이다. 변호사라는, 에이미가 변수에 넣지 않았던 닉이 가져온 현실의 소스 때문이었는데. 닉은 전국민이 볼 수도 있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에이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스스로 사랑을 말하게 하는 것, 그 마음이 진실이든 아니든 종결한 대화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에이미는 이것을 놓지 않는다. 언론과 세간의 눈앞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나타난다.
에이미는 임신, 불륜, 살인등 현대 사회가 민감하게 작동하는 발화를 이용해 닉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온갖 추측과 비방이 난무하는 말하기(언론)을 향해 닉이 선택할 수 있었던 수는 어째서 다시 '말하기'였을까. 에이미-닉의 사랑하는 연인사이에 시작한 말하기-듣기의 문제점은 언론-대중의 소통의 문제점으로 옮겨진다. 언론이란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다 심오한 작동 방식을 갖아 신중한 발화를 한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이뤄지는 대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를 것 없었을 뿐만아니라 문제점은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결혼과 지루함, 불륜과 파경을 두 종류의 '대화'를 통해 성공적(?)으로 풀어간다.
결혼이라는 제도-혹은 사랑, 그것이 갖고 있는 불가피한 결핍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닉과 에이미를 행복하게 했던 어떤 곳에서나의 섹스, "우리는 너무 잘 맞아"라는 속삭임, 서로를 영원으로 이끌었던 확신을 어리석은 것이었다고도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말하고 듣는 자세를 한 가지로 오래 머물렀던 것에 대해서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이미가 퇴근해 왔을 때, TV화면에 총을 겨누며 자신을 흐트러뜨렸던 닉의 자세와, 그것을 보고 굳은 얼굴로 대화를 냈던 에이미의 목소리. 서로를 그런 모습으로 만나게 했던 그날의 시간과 공기에 대해서는 할 말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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