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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채볶음, 무말랭이, 두부조림, 그리고 겨울만두를 했다. 그리고 우울해서 <우리 시대의 화가>를 읽었다. 세수를 하고 와도 여전히 가시지 않는 우울. 세상에 블로거들이 없었더라면, 아니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나는 대체 어떻게 요리를 했을까 겨웠던 감탄과 다행은 온데간데 없었다. 겨울만두는 분명히 생김새는 같았다. 만두피를 잘 굽는 것이 관건이었는데 굽고 나니 너무 딱딱하고 질겨서 제대로 씹히지가 않았다. 두 개 이상 먹는 것은 무리였다. 무말랭이는 분명히 10분을 불리라고 했는데 무를 덜 불려서 무의 쌉쌀한 맛이 턱에 엉겨 씹히지가 않았고 오징어채볶음은 (부드럽게 하려면 마요네즈를 넣어주세요^^) 마요네즈를 너무 많이 넣었는지 부드럽기는 한껏 축축해서 축축 늘어진 모양이 되었다. 가위로 좀 잘라서 할걸 하나를 들면 한뼘 크기로 늘어지는 기다란 모양 때문에 한껏 위축되었다. 동생들은 가짓수 많은 상에서 말없이 우물우물 하다가 '밥이 잘되었네!' 라는 둥 '햄이 잘 구워졌네' 라는 둥 반찬을 피하는 말을 했다. 오래된 음식 같아. 둘째가 소근거렸다. 뻥치지 말라고! 완성된지 불과 세시간도 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두부조림을 하던 차였다. 바글바글 끓어서 졸여지고 있었다. 석이가 개수대에 밥그릇을 가져다 놓으면서 "지옥에서 온 것같아...우리집 두부조림은 빨간데 이건 왜이렇게 시꺼매..."하며 후라이팬을 들여다 보았다. 후라이팬을 보니 정말로 두부들이 지옥불을 껴앉고 있었다. 왜이렇게 까만 조림일까. 간장의 까매서 한 숟갈 덜 했는데도 까맸다. 하지만 이제는 다 졸아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접시에 한 김 식혀 놓을 수 밖에. 맛은 이미 정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밥을 다 먹고 동생들은 문을 열며 나를 위로하면서 일어났다. '두부조림은 맛이 있었어'얘기하며 둘째를 얼른 끌여들었다. 그치? 석이는 한숨을 쉬었다. 지옥에서 온 두부가? '아냐 그래도 그건 꽤 좋았어.' 둘째가 말했다. 그런데, 하며 날라온 직격탄. 언니가 한 건 이상하게 혼자 사는 80대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같아.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기분 나빠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혼자 사는 80대 할머니셨다. 우리는 혼자 사는 80대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매도하고 있었다니까...혼자 있고 싶어졌다. 무치지 않은 무말랭이가 반 남았고, 날로 먹어도 맛있는 오징어채는 이백 오십그램이 남았다. ...만두피는 40장이나 남았다. 무엇이 될 가능성으로 남아있을 때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덜덜 떨며 냉장고 속에 있다. 그러니까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가능성을 망치고 나서야 맛을 보여주게 될까. 뱃속이 편치 않다.
덧 1. 밑반찬을 만든 기념으로 엄니께 보여드렸다.
나: 사진 전송/엄니! 반찬 만들었슈!
엄니: 무슨 반찬이니?
나: ...무말랭이랑 오징어채볶음이요
엄니: 그렇구나! ^^장하다 자꾸 해봐야 네 요리가 되는 거란다
나: 그런데 왜 못알아봐요ㅠ흐힝 무말랭이는 덜 불렸는지 딱딱하고...(중략)
엄니께 답장이 안온다. 왜 알아보시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덧 2. 우리는 셋이라서 싸우는 가짓수도 상상 이상이다. 첫째와 둘째가 싸우거나 둘째와 셋째가 싸우는 조합은 아무것도 아니다. 둘째가 어지럽힌 거실과 셋째가 싸우거나 첫째가 해놓은 반찬과 둘째와 셋째가 힘을 합해 싸우거나 셋째의 라면스프에 둘째가 화내거나 하는 식으로 가짓수가 거의 무한대다. 매일 싸우다가 지친 어느날 우리가 셋이라서 좋은 이유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바로
여름에 수박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혼자라면 수박을 먹을 수 없을테니까. 우린 한 통도 문제 없다. 흠집없는 좋은 점을 발견해서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수박을 먹을 수 있다고! 여름이라서 수박이 있고, 우리는 셋이라서 수박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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