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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그 더움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과 다른 이유로 바깥을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는데,
오늘의 추위를 생각하다 보니 성냥을 그어 손바닥의 추위를 녹이고는
발의 추위를 잊어보는 마음으로 그 날을 생각한다.
그곳은 내가 본 어떤 도시보다 도시 같았다. 상상 속의 도시가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유사한 비유로는, 그렇다. 건축 모형의 세계라면 어떨까. 나무들, 조각물들, 스티로폼으로 칠해져 서 있는 가로등과 하나의 포즈만 취하고 있는 사람들. 그곳은 생활하는 곳이 아니었다. 비루한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 근사하게 송출되는 모습을 담는 직업인의 세계였고, 그들은 사무실 안에 주로 있었으므로 바깥의 보도와 광장은 깨끗하고 평화로웠다. 그 고요함이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의 도시에서 교육이 있었다. 몇 개는 서로를 구하고 몇 개는 서로의 시간이 구덩이 속으로 빠지는 것만을 바라보는, 누군가는 이만 구덩이를 그만 덮고 나와버려야 하는. 비슷한 얼굴의 교육이었다. 그게 끝나고 주변 카페를 찾았다.
마마스였다. 퇴근 무렵의 오후라 가게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미팅하는 사람 몇과 다소 이른 저녁을 먹으러 온 가족이 다였다. 나는 해가 잘 들지만 에어컨이 시원한 자리에 앉아 파니니를 주문했고, <비밀의 숲>을 보기 시작했다. <비밀의 숲>은 당시 내 최대의 엔터테이먼트였다.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 하루에 한 화씩만 보았고, 다음날 내가 보지 못한 한 화를 기다리는 재미에 행복했다. 치즈가 늘어나는 파니니. 한 화를 보면서 파니니를 천천히 먹었다. 한 끼로 충분한 자리였다. 오십 분 동안 천천히, 접시가 비워졌다. 찌는 듯한 해는 시원안 카페 안에서 안온했다. 몸이 으슬으슬해질 무렵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 공간에 있던 일이 즐거웠다. 모처럼의 여유였고, 좋아하는 것에 온전히 빠진 시간이었다. 올해 행복한 순간을 생각해보니 가장 먼저 이 날이 떠올랐다.
생활에서 필요한 건 몇 가지의 규칙 뿐인 것 같다. 내가 지키고 싶은 가지와 지켜야 할 가지, 저마다 다른 모양과 굵기의 나무를 가져와 나의 땅에 소중하게 설치한다. 처음에는 하나였다. 그리고 해가 지날수록, 해와 비례하지 않고 가지는 많아졌다. 거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를 설치한다. 그걸 잘 엮어 올리는 게 나이를 더하며 할 일인것 같다. 스물과 서른의 가지들이 나를 자라게 할 수 있도록 돌본다. 그 와중에 나는 어디에서 또 다른 가지를 가져와 뿌리를 다듬는다. 다음 가지를 어디에 심을지 살핀다. 그게 삶을 다음으로 가져가는 일은 아닐까. 그 중에는 내가 힘들 때 쉬어가는 가지도 있을텐데, 그날은 그곳에 걸터 앉아 평화롭게 쉴수 있었던 것 같다. 때마다 쏟아지는 가책들이 그날은 나를 찌르지 않고 그늘이 되어주었다.
요새 삼사년, 사오년 전에 사놓은 책을 읽는다. 그때는 당장에라도 읽을 것처럼 샀던 책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행복하게 읽는다. 오늘을 위해서 그 옛날 책을 사두었던 것 같다. 물론 그동안 전혀 읽지 않았거나, 읽어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삼사년 후의 나를 위해서 당장에는 읽지 못할 두꺼운 책을 사두려고 한다. 외롭고 부족한 나에게 힘이 되줄 것이다.
그날 카페에서 나는 12월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끝나지 않을 듯한 더위가 그저 그만하기를 바랬을텐데. 그날의 기억에 근사한 캐롤을 틀어주고 싶다. 얼마 전에 알게 된 노래다.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감미롭고 행복한 노래를 만드는 날이라면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나도 충분히 기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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