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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십구일이라고 시작하는 일기가 있다. 장에서 뜯어져 나와 지저분하다. 공책을 다시 새 것처럼 쓰기 위해 뜯어냈던 것 같다. 그 공책에 있던 글은 이것 뿐이었다. 집게로 집어 놓은 뭉치는 어쨌든 글씨로 빼곡히 채워져 있기 때문에, 읽을만한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기를 뛰었고 두꺼운 이불을 꺼냈다. 비닐 속에 오래 있어 냄새가 나 밖에 널어두었다" 계속 읽겠다고 한다면 읽을 수도 있지만, 그만하기로 한다. 작년 시월에 달리기를 뛰었다는 것 같다. 시월은 아직 멀었지만 달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결혼식이 있었다. 그래서 엊그제 옷을 사야했다. 언제 입을거냐고 묻는 말에 '내일'이라는 대답은 점원들은 하나 같이 실소케 했는데, 나로서는 최선의 움직임이 끝간데 몰려서 움직이는 게으름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변명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오늘 옷을 사야해서요. 특별히 어울리는 것이 없는 가운데 두시간이 지났고 그중에 최선을 사자는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 그리고는 처음 가보는 집에서 한바퀴 둘러본 후 바로 샀다. 그 전까지는 아까 그 가게, 투피스의 치마와 블라우스로 생각해 놓고 있던 참이었다. 민소매의 원피스를 그냥 입을 수 없기 때문에 자켓까지 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년에 두 번 이상 입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옷이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어제가 그날 중 하나였다.
적기 쉬운 것만을 골라보면 그날 인상 깊었던 축가를 빼놓을 수 없다. 피아노를 치며 불렀던 노래는 정인의 '오르막길' 이었다. 그것을 부른 사람은 신부의 대학 선배였는데, 나는 그를 그날 처음 보았다. 아는 사이인가 하면, 그렇다. 횟수로 치자면 벌써 너덧해 전에 그 이름을 통해 나는 신용카드를 발급받은 적이 있었다. 친구가 내 선배중에 하나가 은행에 취직을 했는데 혹시 네가 카드가 필요하다면 그를 통해서 발급받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했다. 그때 처음 카드를 발급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카드를 아직도 잘 쓰고 있다. 이런 사연에 김재훈이라는 이름을 어제로 처음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노래를 꽤 잘했다. 그가 아직 그 일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거야'로 시작하는 노래를 들으며, 이 먼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그와 친구인 신부의 인연의 따뜻한 배경 속으로 러브 카드가 둥둥 떠다녔다. 쓸만한 카드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나는 이 카드로 노트북을 구입하게 된다.
올라오는 길이 멀었다. 홍제역에서 버스를 갈아탔다. 나는 그 동네가 왜 이렇게 서울 같은지 모르겠다. 완벽하게 이방인으로 느껴진다. 방금 내가 서울같다고 했던가, 서글프다는 말을 하려던 참이다. 이렇게 느낀 연유에 한번은 <과천,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이>라는 소설을 들었던 날이 있었다. 과천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여기가 과천같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뜻 없이 주절거리는 맥락 없는 말들과 잘 어울렸다. 홍제는 내가 집에 가기 위해 거치는 환승역에 불과했지만 과도한 인상이 심어진 까닭은 무엇일까. 환기로서 낯선 장소가 회한을 모두 받아내는 모양일까. 장시간 버스를 타과 왔기 때문이고 또 앞으로 종점을 향하는 버스를 타야 하니까. 아니면 실제로 과천과 닮았을 모양인지도 모른다. 과천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일곱 살 때 유치원 소풍으로가서 끔찍한 멀미에 온종이 토하던 일뿐이면서. 얼토당토한 몇 가지 가설을 수긍하고 싶은, 지친 밤이었다.
어젯밤, 다시 홍제역이었다. 이때 걸었던 슬픔은 나중에 이야기 하기로 하자.
다시 결혼식 이야기로 돌아가 나는 행운을 빌었다. 행복은 넉넉히, 둘이 만들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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