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피아노와 책장

_봄밤 2015. 1. 10. 23:35

 




 

엊그제 갑자기 전화를 하셔서는 피아노를 치우려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고등학생 때 교복을 말없이 처분할 때 몹시도 길길이 날뛰었고, 닳도록 보았던 책 전집을 상의없이 중고로 넘기며 일어났던 불란을 지나 이제 저 큰 물건을 치우기 전에는 귀띔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신 것 같다. 그런 고민 끝의 말씀을 나는 차분하게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렇게 해야한다고. 어떻게 처분할 건지 그런걸 물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지, 피아노는 내가 일곱살 때.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던 세상일 때 내가 갖고싶다는 명확한 표현으로 얻어낸 선물이었다. 유치원을 다니면서 오르간이라는 것을 처음 본 꼬맹이는 무작정 저걸 치고 싶다며 몇날 며칠 엄마를 졸라 읍내 학원으로 향했다. 같이 다닐 만한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온통 모르는 초등학교 고학년 언니오빠들에 끼어 윗가게에서 학원차를 곰곰이 기다렸다. 백원이나 이백원하는 과자를 사먹으며 구석에서 불을 쬐었고 그렇게 학원차에 올라서 좀처럼 가보지 못한 읍내까지 혼자서 잘도 다녔다. 그러나 피아노에 숨겨진 재능이 있었다거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피아노 학원을 다닌 처음 일년은 음표를 그리는 일에 더 집중해야 했으니 말이다. 바이엘을 다 뗄 무렵 엄마는 피아노 학원 원장님과 상의해 상아색 피아노를 사주셨다. 학원을 다니게 해달라는 것만큼 피아노를 사달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당시의 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나는 그 색이 꼭 마음에 들었다. 검정색 피아노는 학원 방마다 하나씩 있었고 지루한 색이었다. 나는 상아색 피아노의 빨간 덮개와 피아노를 잠그는 구릿빛 열쇠를 좋아했다. 자주 치지는 않았지만 바닷가 근처의 해풍으로 일년에 한번은 조율을 받아야 했다. 나는 같은음을 여러번 누르며 조율하는 동안에도, 끝난 후에도 말을 거의 하지 않던 조율사 아저씨의 짧은머리를 기억한다.

 

부모님은 내가 피아노 치는 소리를 좋아하셨는데, 나는 피아노를 그대로 두는 것을 좋아했다. 언젠가는 내가 그렇게 치고 싶어하면서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던 일이 믿겨지지 않을만큼 흥미가 없어지기도 했다. 부모님은 근처의 밭에서 피아노 소리를 내내 기다리시고 나는 피아노를 그대로 두며 놀았다. 한번은 밤이가 피아노를 치면 밭에서 힘이 무척 날텐데. 라고도 말씀하셨지만 내 생각에 밭은 너무나 멀었으므로, 피아노 소리가 거기까지 들릴리가 없다. 라는 말로 받아쳤다. 당연히 들리지, 저 멀리까지 들린단다. 라고 하셨다. 그 말씀 이후로 나는 몇 날은 어설프게나마 피아노를 쳤다. 들린다는 말씀을 믿어서가 아니라 땀으로 얼굴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로 좋아하는 것이 달랐으므로 안타까운 시간이었다. 점점 피아노를 치지 않게 되었고 이제 치는 소리가 낯설 무렵 일년에 열두번 오는 딸이 덮개를 한 번 열지 않는 피아노를 그만 처분하시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책장을 놓으려고 해. 나는 책장이라는 말에 놀라고, 또 반가웠지만 아직 회사였다. 기쁘게 전화를 받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라도 회사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못했으므로, 내일 가구점에가서 보려고 해. 내가 당부한 '보기'만 하라는 말씀은 잊으신 것 같았다. 다음날, 내게 사진이 몇 장 도착했다. 그것은

 

밝은 장판의 거실과 어울리지 않게 거대하고 색이 어두운 책장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고, 정면에서 측면에서 또 앉아서 찍으신 사진을 넘겨보며 벌써 책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며, 진짜 크고 멋져요... 라는 말을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기뻐하시는 모습이 선했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을 미워할 수는 없었다. 누구라도 좋은 것을 갖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그 책장을 밉다고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결혼한지 삼십년 만에 처음으로 갖게된 당신들의 책장이었으므로.

 

그 엄중해 보이는 책장은 다홍색 슬레트 지붕의 집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멋지다며 연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느이 방의 책들도 꽂으면 좋겠구나. 당연히 그렇게 한다고 했다. 이제는 절판되서 구할 수도 없는 혼불을 구하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책장이 깊기는 얼마나 깊은지 토지와 태백산맥을 겹으로 꽂을수도 있단다! 라며 자랑하셨다. 나는 그 자랑을 며칠이고 내내 부러워한다. 전화해서 물으면 책장의 안부를 묻고 어떤 책이 몇층에 꽂혀 있는지 묻는다. 집에 돌아다니는 책이 좀 많지, 하며 그 책들이 모두 가지런히 꽂혀 있을 것을 생각한다. 엄마는 값은 물어보지 말으렴. 엄청나게 비싸. 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엄청나게 비싸보여. 라고 말을 받았고, 그 말씀에 또 얼마간 흡족해 하실 거였다. 배가 불러라. 그런 대견한 마음으로 당신들의 집에 이렇게 커다란 책장을 들여놓았다는 것으로. 나 역시 그런 마음에 진심으로 기뻐하려고 한다. 어울리지 않는 것을 들여놓은 것에 대해 안쓰러워 하지 않고, 밝은 장판이나 다홍색의 슬레트 지붕을 생각하지 않고, 그 책장 하나만으로 충분히. 기꺼워 하고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