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저포기 송재학 이사씨(異史氏)*가 말한다. 모년 모월 송생은 만복사 스님과 주사위 판을 벌렸는데 노름이야 도깨비 살림이라지만 스님과 송생은 서로 종잣돈과 뒷돈을앞장세워 시비를 가렸는데, 과연 스님을 아슬하게이겨 목숨을 부지한 송 아무개는 그날 억지로 경을한 권 받아 유심히 살폈으니, 낡고 희미하지만 문장이 맑아 세상의 책이 아닌 듯했다 두근거리며 진동걸음으로 경을 숨겨 돌아온 서생, 수백 번 읽고 외우고 찢고 태우며 허공의 소리가 들린 후에야 고향 땅아무개산 츠렁바위 인근에 가묘를 썼으니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심란했더라 하 수상한 세월 지나 누군가 만복지보를 찾아 봉분을 파헤치니, 책은 먼지처럼 바스러져도 보물은 고스란히 있을지니, 파묘자는 먼저 황장목관에서 깨끗하면서도 무늬 없는 상자를 볼 수 ..
내부의 안부 김소연 엽서를 쓰고 있어요 너에게 쓰려다 나에게 오래전에 살았던 주소를 먼저 적었어요 엽서의 불충분한 지면에 고양이가 와서 앉았어요 고양이가 비킬 때까지 연필을 놓고 고양이가 비킬 때까지 연필이제 그림자를 껴안은 채로 누워 있는 걸 바라보다 연필과 연필의 그림자 사이를 기어가는 개미를 지켜보았어요 아침에 세면대 속에서 만났던 두꺼비에 대해 엽서를 쓰려다 거울 속에서 보았던 검은 얼굴에 대해 쓰고 있어요 친해질 수 없었던 얼굴과 친숙해져버린 천한 사람에 대해 빵 부스러기로 축제를 여는 개미와빵에 잼을 발라 허기를 비켜가는 나 사이에잠깐의 친분이 싹트고 있습니다 엽서를 쓰고 있어요 너에게 쓰려다 나에게 조금 전에 만났던 누군가를 조금 전의 감정으로 회상하기 시작했을 때 엽서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
흑백 4 이준규 선인장과 낮과 색안경과 연고의 사이에 있다 버스와 치과와 헌책방과 학원과 행상과 좌판과 커피와 김치찌개와 초인종과 나뭇가지에 걸려 한 시절 보낸비닐과 오후의 낙지와 오전의 화장실의 발레리와 자개장과비단과 백조와 향수 사이에 있다 여성은 옷을 입고 나갈 수 있는 존재이다 유리에 비친 얼굴을 본다 허리가 나쁘다 잃어버린 열쇠를 닮았다 고통을 포함한 어마어마한 낱말과 모음으로 끝난 체언에 붙는 조사와 성장한 뒷모습 시계를 보면 항상 시간이 있다 그 시집에는 일상을 드러내는 어휘가 많다 밥이 다 되었다 이준규, 『흑백』, 문학과지성사, 2008. 그만의 스타일이 자리잡는 이후의 시집이 물론 더 좋다.그러나 시작은 불안해서 좋다. 기존의 말과 그의 말이 섞여 싸운다. 이후를 점쳐 볼 수 있다. 흑..
대명사 캠프 김승일 이름을 불길해하는 사람들. 윤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나라고만 소개하고, 너를 너라고만 부르는 사람들. 우리는 대명사 캠프에서 만날 거예요. 갈대를 그것이라고 하고. 바람도 그것이라고 하고.그것이 그것에 흔들린다고 하면. 주문을 웅얼거리는기분이 된다. 주문을 그것이라고 하고 기분을 무엇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웅얼거리는 무엇. 당신은 어디서 살다 왔나요? 저기서요. 이럴 수가.나도 당신처럼 저기서 왔어요. 다신의 저기와 나의저기가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위로가 되죠. 우리는 빙 둘러앉아서. 캠프파이어의 대명사가되려고 한다. 황당하군. 여배우더러 이름도 없이 살라는 건 사형선고죠. 그녀를 그녀라고만 불러서 속상한 사람이 생겼다. 서운하면 돌아갔다가. 돌아오고 ..
파도 이병률 축구를 응원하러 대인파가 모인 시청 앞 광장 보기에도 충분히 허름한 부부가 군중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아내로 보이는 여자는 실명한 듯 한쪽 눈이 패었고 아내의 꿰맨 가방을 메고는 앞서 느리게 걷는 남자는 야윈 몸이 작아도 너무 작아 바스라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바깥을 서성이다 못해 밀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눈을 떼기 싫었던 건 나란히 붉은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였다 그때 사내가 몸을 돌려 아내에게 뭐라 귀엣말을 하는것 같았다 그때 중심에서 출렁 함성이 터지는 바람에 아내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들었다 섬에 가자고 했다 잘못 들었다 집에 가자고 했다 생활이 말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아니 생활을 넘지 못해 미안하다 앉자고 했다 잘못 들었다 웃자고 했다 바다를 건너자 했다 아니 ..
봉인된 지도 이병률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을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
내일은 중국술을 마셔요 이장욱 어젯밤의 거리에는 고양이들이 무한하게 숨어들고숨고 달리다가 영원히사라지고 우리는 작년에 복권을 사고올해도 우리의 인생은전문가들이 이끌어주겠지 나는 꿈 밖으로 새나가는 목소리를 막았으면 해부디 당신이 내게 관대할 수 있도록 3년 후에는 조금씩 무능력해져서 행복하고5년 후에는 아주 오랜만에 반성을 하네 오늘은 완벽한 인간으로 살겠지만내일은 그런 것들이 좋다 잠 속에 꽂힌 화살이 바람에 흔들리고또 이 밤엔 영문을 모르고 깨어나겠지 내일은 중국술을 마시고고양이들이 달리는 거리를 걷기로 해요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밤의 거리에서하루 종일 유리창들은투명하느라 바쁘고 우리는 고양이처럼 섬세하게숨고 달리다가 영원히 사라지고 이장욱, 『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사, 2006. 이 사람은 누..
다음 생에 할 일들 안주철 아내가 운다.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다음 생에는 집을 한채 살 수 있을 거야.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아내는 피식 웃는다.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아내는 밥을 차리고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된다.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
우리 약국 갈까 임승유 소풍이라도 가자는 것처럼 말하니까 호루가기가 생각났다 호루라기를 부니까 노을이번지기 시작했다 피가 돌기 시작했다 손끝까지 가서불끈 쥔 주먹이 될 거야 숨이 턱까지 차오를 거야 핀셋으로 아스파라거스를 뽑아냈다 목에 걸린 달리아가 호루라기는 고여 있다고 말한다 하늘이 텅 비었다고 말한다 지렁이도 질병사를 할까 귀뚜라미는 구름은 더 작아지고 싶다면 약국에 가는 거다 약국은 알약들의 세계 분말들의 세계 목구멍의 세계 의자처럼 창백하다는 건 뭘까 에 대답하기 위해 우린 약국에 가고 있었던 거잖아 오렌지가 먹고 싶었다면 소풍을 가자고 하지 그랬 니 대관람차를 탄 것처럼 피로하구나 오렌지가 먹고싶었다면오늘 아침의 신발 정리와 수첩과 물병을 다 합쳐 오렌지가 먹고 싶었다면 우리 소풍 갈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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