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주의보 박준 이틀 내내 비가 왔다 미인은 김치를 자르던 가위를 씻어귀를 뒤덮은 내 이야기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발밑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이꼭 오래된 누군가에게 받은 용서 같았다 이발소에 처음 취직했더니머리카락을 날리지 않고바닥을 쓸어내리는 것만 배웠다는친구의 말도 떠올랐다 미인은 내가 졸음을그냥 지켜만 보는 것이 불만이었다 나는 미인이 새로이 그리고 있는유화 속에 어둡고 캄캄한 것들의태(胎)가 자라는 것 같아 불만이었다 그날 우리는 책 속의 글자를바꿔 읽는 놀이를 하다 잠이 들었다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2. 가끔 책상을 기울여 모든 것을 버리고 싶다.
창이 터지려 한다. 자신의 용량을 넘어선 빛을 창은 추스르지 못한다. 기어이 쌀통을 기어나와 바구미가 죽어 있다. 생명의 양식은 그 세계가 어느 창을 통과해 이른 곳인지 묻는다. 대답하지 않는다. 김병호, 『포이톨로기』, 문학동네. 안쓰는 볼펜이 가방서 이리저리 늘 흔들리는 것처럼 나의 저녁과 상관없이 미안한 일이 늘 몇 개 주머니에 머문다. 12년에 나왔던 책인데 저번주 오후 나절에 샀을 때도 여전히 초판이었다. 오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라고 하면 더욱 미안한 일이 되겠지. 12년도에 샀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이 많아서 읽다가 말았다. 어젯밤 불현듯 펴 들었을 때 들어온 구절이다. 그걸 바구미라고 부르는가. 부스스하며 쌀통을 기어다닐, 사실은 우리집엔 쌀통이 없지. 쌀 포대를, 포대는 미동이지만 거..
지금 막 허공에 번지는 무수한 빛깔들을 말하려는 힘 퇴근 시간과 임종이 각자의 비율로 임박하려는 힘 곤충들의 밤이 깊어가는 힘 맹세하지 않는 힘 확인하려 하지 않는 힘 우리는 사실들 속에서 태어났다 세상의 모든 가로수가 황혼 녘의 바로 이 나무가 되는 속도로 어둠이 오는 길을 하나하나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사실로 물들어서 사실들의 참된 의욕과 함께 이장욱,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2016, 문학과지성사. 표4에 실린 글이다. 잘 몰랐을 때 나는 표4가 '표사'인줄 알았다. 생각하기에 '표사'는 표구表具와 비슷한 의미로, 책의 뒷장에 특별하게 실린 글을 이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으며 단순히 업계에서 통용되는 기호였다. 표지부터 책의 앞날개, 뒷날개 그리..
몸의 애인 이이체 잘못 온 편지를 읽고 운 적이 있다 나는 당신의 거짓말들을 안다사랑을 잃은 자의 심장을 꺼내본 뒤로는백지에서 용기가 나지 않는다몸은 표현을 두려워한다 당신에게 나를 주어선 안 되겠구나당신에게 나를 주면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아나는 죽겠구나 부재가 되지 못한 존재 헤어진 애인과의 섹스에서혐오가 무뎌질 때까지,그 감촉의 비곗살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멀미를 잊으면 나는 사라질 수 있다 이이체, 『인간이 버린 사랑』, 문학과지성사, 2016. 11p 사랑하느라 혼났구나.
소나기 온 뒤 채호기 그때 내 앞에, 포옹하기엔 너무 큰 나무.흰 북극곰 같은 서늘한 바람이 여름 큰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나뭇잎들이 부풀어 오르며 뒹군다. 뜨거운 잎 안의 얼음들, 여름의 빛나는 결정체들,설명할 수 없는 삶의 어떤 환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낯선 시간, 낯선 얼굴, ….낯설어 멈춰 서고 싶은 다정한거리에 햇빛은 빈틈없이 찬란하고, 갑작스런 생의 전환이 눈부시다. 물 묻은 태양이 덜 마른 공기를 털어낸다. 부유하는 물- 먼지들, 설명할 수 없는삶이 여전히 낯선 길모퉁이로 빨려든다. 텅 빈 거리에 한마디 말이 남아 반짝인다. 아직 마르지 않은 구석에 고인 빗물, 말하고 싶은 욕구로 혀 밑에 침이 고인다. 삶이 여전히 낯선 길모퉁이로 빨려든다 - 봄밤에게 내 마음 보고서 http://ww..
오늘부터 우리는(Me gustas tu) 노래 여자친구/ 작사 이기, 용배 * 널 향한 설레임을 오늘부터 우리는 꿈꾸며 기도하는 오늘부터 우리는 저 바람에 노을빛 내 맘을 실어 보낼게 그리운 마음이 모여서 내리는 Me gustas tu gustas tu su tu tu ru 좋아해요 gustas tu su tu ru ru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노래 스윗소로우/ 작사 노영심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잊은 듯 눈 감아도 난 너를 아닌 듯 돌아서도 난 너를 조금만 솔직해도 나 너를 그렇게 아파하도록 너를 이렇게 바라보도록 쓸쓸한 눈으로 다만 웃고만 있었지 나의 잠과는 무관하게 강성은 커튼 사이로 바람이 감은 눈 사이로 바람이 어항 사이로 바람이 날벌레들 사이로 바람이 낮잠 사이로 ..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팔다리가 앞뒤로 막 움 움 움 움직이는 게 숨 크게 들이쉬면 갈비뼈 모양이 드러나는 것도 내쉬면 앞사람이 인상 팍 쓰며 코를 쥐어 막는 것도 놀라와 놀라와 놀라와 Amazing '열심히'나 '잘'이 없는 놀이의 세계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신기해' 라고 말하는 순간 신기하지 않은 일은 어디에도 없는, 마법이 일어난다. 지루할 수도 있는 소재를 과감히 가지고 노는 재능에 감탄 또 감탄. 그 재능을 흥행이라는 잣대에 기울이지 않고 쓸 수 있는 얼굴에 응원과 응원을. 이 앨범은 그동안 탄성을 불러일으켰던 악동뮤지션의 노래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마주본 사람, 혹은 곁에 앉았을 때 다리를 꼬는 행위로 미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면면을 풀어낸 노래 나 오늘도 라면을 먹으며 이게 '꿈이(..
정오 신영배 계단 위에 화분화분 밑으로 물이 흘러내려계단이 한 칸 두 칸 세 칸 젖어 있다화분 옆에 소녀엉덩이 밑으로 그림자 흘러내려계단이 비스듬히한 칸 두 칸 세 칸 젖어 있다해가 머리 위로 움직인다계단 위 물 한 칸이 마른다계단 위 그림자 한 칸이 마른다바람이 사람처럼 지나간다다시 한 칸 물이 마른다다시 한 칸 그림자가 오그라든다뒤에서 문이 열렸다 닫힌다소리 없이 집이 열렸다 닫힌다마지막 한 칸 물이 마른다마지막 한 칸 소녀가 지워진다 신영배, 『기억이동장치』, 문학과지성사, 2015년, 11쪽. 어디서부터 반했게 '한 칸 두 칸 세 칸' 할 때부터.수직의 계단을 게걸음 치듯 옆으로 한 칸씩 길게 칠해 나갈 때부터.'엉덩이 밑으로' 흘러내리는 그림자를 그릴 때부터. 장면이 바랄 때까지.지하의 서점이었..
덴마크 다이어트 서윤후 우리는 다 잘한다 피를 거꾸로 속이며 노력한다 할 건다하는 질량들, 보존되어 가는 교과서 속 알고리즘 반대로해야 멋있는 줄 아는 껍데기들, 벗으면 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빼야 한다 나머지가 생기지 않도록 권리는 없었다 뾰족해지면 어른들은 우리를 꼭짓점이라부를 것, 기억될 방점으로 생길 거야 몸속의 뼈들이 장작으로 나타날 때까지 땔감으로 쓰기엔 너무 젖어 있는 둘레,서로를 껴안아 주지 못했다 모서리가 생겼다 우리를 꼭짓점이라 불러 주는 사람들, 오늘은 생일이다 우리 이름을 부피가 아닌 피부로, 아니면그냥 피로 불러 주길, 가파른 곳으로 갈수록 설 자리 없는청정 지역이 보인다 어제의 식단이 내일이 되는 것은 유감이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울었다 도형이 되는 일, 야윈 부엌에서 부..
시작은 코스모스 유계영 낮보다 밤에 빚어진 몸이 많았기 때문에나는 병이 비치는 피부를 타고났다 모자 장수와 신발 장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가끔은 갈비뼈가 묘연해졌다죽더라도 죽지 마라발끝에서 솟구쳐 사랑은 온몸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그대는 나의 바지다나도 죽어서 신이 될 거야그러나 버릇처럼 나는 살아났다 검은 채소밭에 매달리면목과 너무나도 멀어진 얼굴두 마리의 물고기가 그려진 국기처럼 서로 마주 봤다 멀리서부터몸이 다시 시작되었다 젖은 얼굴이 목 위로곤두박칠쳤다 유계영, 『온갖 것들의 낮』, 민음사, 2016년.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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