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 황인찬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부자의 아내 창밖으로는 삶이 부서지지 않는 풍경이 펼쳐져 있고, 복도에 울려 펴지는 내아이의 이름이 있는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너의 사촌 형 일 년에 한 번, 머나먼 시골집에서 너를 만나고, 두 사람의 비밀은 죽을 때까지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뒷산의 돌무덤 아름다운 세계가자꾸 이곳에 있고, 항상 까닭 모를 분노에 시달리던 어린시절도 다 지나갔다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내가 되고 싶었던 것 하지 말아햐 할 것은 해서는 안 되는 것 눈을 뜨면 아침이 오고, 익숙한 한기가 발밑을 맴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지만 열지 않았다 황인찬,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9
가시를 위하여 김선재 통증을 용서해요 부분이면서 어느덧 전체가 된 나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이, 날을 세운 날은 아니지만 나면서 당신이고, 당신이지만 나인 시간을 견뎌요 나는 기원에서 멀어졌다 이미 나는 숲의 변형이며 혹은 바다의 변종이다 형식에서 멀어져 속도 없고 겉도 없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라진내용이지만, 여전히 전체를 제압한다 형식을 제압한다 나는 혀의 어순이다 돌기들 사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하나의 돌기는 혀일까 바늘일까 미각은 우리의옛 성질이었으나 지금 너는, 나는 혀인지 바늘인지,짠맛인지 쓴맛인지 수시로 아픔을 확인하는 너인지나인지 같은 온도를 갖기 이전에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니었죠 그러니 제 분을 못 이긴 팔매질을 용서해요 때로 실감의 모서..
키스의 시작 김중일 두사람 지평선 왼쪽 맨 가장자리에서 공기로 빚은 얼굴만 한 빵을 한입씩 나누어 베어 물듯 고요하게 왼쪽 맨 가장자리가 지구 한바퀴 돌아 오른쪽 맨 가장자리를 따라잡기까지 순식간에 실업한 두사람 발치에 떨어진 풍선을 몰래 들듯 가만히 두 손으로 서로의 얼굴을 들고 온몸 부풀어 떠오르도록입 맞대고 서로를 숨처럼 서로에게 불어넣고 어느새 달아오른 살갗 주름진 표정을 뒤집어쓴 두사람 온몸을 서로에게 구겨넣고 이제 멀리 떠나버리려는 듯마지막으로 키스하는 두사람 서로의 몸속에 각자 온몸을 다 쏟아붓자 사라진 두사람 눈앞에서 남은 건 한주먹의 투명한 적막뿐 적막을 걷고 맨 앞으로 등장하는 두사람 숨소리로 빚은 얼굴만 한 빵을 한입씩 베어 먹듯 막 키스를 시작하는 두사람 김중일, 『내가 살아갈 사람..
피의 종류 이장욱 오늘의 햇빛은 감정을 지우는 데 쓸모가 있다.공공장소에는 비둘기들이 어울려.새들에게도 혈액형이 있고그들만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사람들은 꾸준히 거짓말을 하며 걸어다녀.누군가는 매일 혈액형이 바뀌고누군가는 피의 종류를 모르지만아이들은 열심히 새로운 습관을 만들었네.오늘의 날씨는 쉽게 솔직해져.갑자기 쏟아지는 빗방울들이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듯이.길가에 납작해진 비둘기가 조금씩길이 되어가듯이.약국 셔터 아래로 신문들이 쌓이고피를 뽑은 후에 사람들은가벼워진 몸으로 다시어제의 거짓말을 시작했다.공공장소에서는 누구나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되고피의 종류에 대해해박해지고 이장욱, 『생년월일』, 창비, 2011.
해삼내장젓갈 최정례 해삼은 이 집 주방이 두렵다. 칼이 무섭고 도마도 무섭다.건드리면 지레 겁먹고 얼른 뭔가를 내놓는다. 한줄뿐인 내장에 이상한 향을 품었다가 위험이 닥쳐오면 재빨리 내장을 쏟아놓는다. 창자만 가져가시고 몸은 살려달라는 최후의 협상 카드를 내미는 것인데, 인간 세상 협상 대신 내장빼앗고 해감 반으로 잘라 양식장에 던져놓는다. 나도 당신이 두렵다. 두려움과 그리움을 구별할 수가 없다.어젯밤 당신 내게 왜 그런 소포를 부쳐왔는가. 우편물이 왔다고 해서 문을 열었는데 거기 묶인 꾸러미 위에 희미하게당신 이름 적혀 있었다. 당신이 내게 뭘 보낼 리 없는데, 어떻게 내 주소는 알게 됐을까 풀어보려는 순간, 이름 희미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대개 꿈 아니면 백일몽이다. 두려움과 그리움..
뼈 이근화 내가 뼈가 될게돼지의 말씀의 가로등의환한 뼈전투적인 머리카락의 검은 뼈 마네킹은 온몸이 뼈처럼 서 있군유리를 긁으며 소리 없이 웃는다오후의 마네킹은 모래언덕 같은데? 독자리 바구니 자전거에는 뼈가 없고밤으로 가는 열차에서는 뼈가 녹아 뼈가 될게 새벽에는참새의 부리가지렁이의 뼈를 부러뜨린다 새벽부터 밥을 먹으니내가 튼튼해지는 것 같아내 뼈를 공원으로 수영장으로 이동시켜줘 잉어들이 바닥에 수염을 꽂고지느러미를 떼어내며 욕하는 것 같은데?뼈의 굵기나 길이는 중요하지 않거든 시계가 뼈를 벌리며 하루를 완성해종소리가 귀에 뼈처럼 꽂혀내가 여기 서 있을게자라서 뼈가 될게 이근화, 『우리들의 진화』, 문학과지성사, 2009. 동짓날은 밤보다 팥죽을 먹던 놀이가 생각난다. 놀이는 끝났고, 동지는 계속 돌아온..
어떤 물음 윤희상 가끔 찾아가는 돈가스집 주인은지난해까지 서점 주인이었다그래서 책표지를 잘 싼다 내가 가방에서 두 권의 책을 꺼내돈가스집 주인에게책표지를 싸달라고 했다 한 권은 불료 법요집이고한 권은 기독교 성경 해설집이다 돈가스집 주인은책표지를 싸다가나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죽어서 어디로 갈라고 그러요?" 윤희상,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 2014. 6. 이 시집을 왜 이제야 샀을까. 카페 꼼마는 이제 10%만 할인한다. 꼼마를 갈 이유도 없군! 10%할인이라면 그냥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이 좋다.이 시집을 사고, 를 내려놨다. 고래는 언제 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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