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유하 오늘밤 나는 비 맞는 여치처럼 고통스럽다 라고 쓰다가, 너무 엄살 같아서 지운다 하지만 고통이여, 무심한 대지에게 칭얼대는 억새풀 마침내 푸른빛을 얻어내듯, 내 엄살이 없었다면 넌 아마 날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열매의 엄살인 꽃봉오리와 내 삶의 엄살인 당신, 난 오늘밤, 우주의 거대한 엄살인 별빛을 보며 피마자는 왜 저 몸을 쥐어짜 기름이 되는지 호박잎은 왜 넓은 가슴인지를 생각한다 입술을 달싹여 무언가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는 밑둥만 남은 팽나무 하나 얼마나 많은 엄살의 강을 건넌 것일까 유하, 『세상의 모든 저녁』, 민음사. 대보름을 알려주었다. 달이 너무 밝아서 하마터면 달을 보지 못할 뻔 했다. 잘 지내라는 말은 언제나 명령했다. 그것은 부탁을 모르므로. 잘 지내. 하고 돌아서는 것..
가난한 날들의 밥상 최치언 당신 미쳤어요 남이 쓰다 버린 밥상은 왜 가지고 들어와요 여자는 신문지 위에다 밥을 차리며 쫑알거렸다 언제까지고 신문지 위에다 밥을 놓고 먹을 순 없잖아 밥상은 정말 낡고 색이 바래 있었다 그런 것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한쪽 다리가 심하게 부러져 있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밥상으로 도대체 뭘 하려고요 여자는 밥주걱을 대신하여 수저로 밥을 퍼담고 있었다 내가 한 손으로 이렇게 받치고 있지 그럼 되잖아 당신 정말 미쳤군요, 그들은 그렇게 밥을 먹기로 했다 여자가 먼저 밥을 먹고 그동안 남자는 밥상을 떠받치고있다 이번엔 여자가 밥상을 떠받치고 남자가 밥을 먹고 있다 정말 왜 이렇게 살아야 하죠 여자가 떠받치던 밥상의 다리를 흔들자 남자의 국그릇이 대신 울어준다 그런데 사실 ..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김선우 번개 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당신의 기울기와 무릎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김선우,『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 2012. 어제 당신이 읽어준 시를 잠결에 듣고 오늘 서점에 들러 꽃대 어지러운 시집을 샀어. 이유가 될까. 당신이 천둥 번개를 사랑하는 까닭을.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모든 것을 잠시 멈추는 빛과 소리에도 나는 여전히 서 있어. 이유가 될까. 당신이 천둥 번개를 사랑하는 까닭이. 잠시 후 소리와 빛이..
매일 더 붉어지는 매일 더 붉어지는배나무의 잎들. 어떤 피를 흘리는지 말해 주오.여름은 아니야여름은 일찍 길 떠났으니.마을은 아니야마을이 비록 길에서 취했어도고꾸라진 것은 아니니.내 마음도 아니지내 마음은 아르니카꽃만큼피를 흘리지는 않으니. 이번 달엔 아무도 죽지 않았거나아무도 외국 노동 허가를 받을 만큼행운이 있지도 않았다.우리에겐 수프가 주어졌고헛간에서 재워졌으며11월에서 정상적인 정도 이상의자살 생각은 더 없었다.어둠 속을 보고 있는 당신이어떤 피를 플리는지 말해 주오. 세계의 손들이익으로 절단되고유혈의 거리에서피를 흘린다. 1985 존 버거, 『시각의 의미』, 동문선, 2005. 7장 을 시작하는 '시'. 책 뒷면의 소개글은 이렇다. 이 도발적이고 무한히 감동적인 에세이 모음집으로 우리 시대의 한..
늑대가 나타났다 이현승 대화가 없는 식사란 이런 것이군 침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늑대는 게걸스럽고 늑대는 거칠고 늑대는 무례하고 그러나 당신의 식사가 식탁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듯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건 그 게걸스러움 때문이죠 늑대의 식서아 앞에서 가족들의 식사는 용맹하죠 악어의 입에 자신의 머리를 넣는 곡예사처럼요 겁에 질린 낙타처럼 밥통을 꺼내야 할지도 늑대는 늘 배가 고프고 그러니까 늑대는 늘 도망 중이고 결과적으로 늑대는 일과 휴식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운 식욕을 가지고 있지요 -중력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세요 식사 중 여행이거나 여행 중 식사이거나 여하튼, 굶주림 없이 늑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곤란해요 포만감으로 충만한 노래하는 늑대를 본 적이 있나요?..
겨울 전부 리산 내가 떠나온 그 밤에 폭설이 시작됐다는 말을 들었다 누가 눈보라 치는 들판에 불을 놓았나 눈꽃과 불꽃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을 겨울 까마귀들 평생 그곳을 그리워했지만 다시는 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같이 웃고 울기도 하다가 다시 만난 기쁨에 손을 꼭 잡고 행복해 하였더라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 사이로 능동과 부정 수동과 긍정 사이로 나부낀다 눈이 오지 않던 눈의 땅 눈보라 눈보라를 기다리며 올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한 잎씩 떼어내던 꽃잎 점 이파리들 안개 낀 국경을 넘어가는 야간열차의 불빛을 바라보며 하루 한 번 한 바구니의 홍합과 꽃가루가 점점이 떠 있는 맑은 차를 구하기 위해 거리의 끝으로 갔었다 그런 어떤 밤이면 길을 잘못 든 고라니들은 산기슭으로 난 도로..
오키나와, 튀니지, 프랑시스 잠 김소연 우리가 갈 수 있는 끝이 여기까지인 게 시시해 소라게처럼 소라게처럼 우리는 각자 경치 좋은 곳에 홀로 서 있는 전망대처럼 높고 외롭지만 그게 다지 우리는 걸었지 돌아보니 발자국은 없었지 기었던 걸까 소라게처럼 소라게 처럼 + 신중해지지 않을게 다만 꽃처럼 향기로써 이의 제기를 할게 이것을 절규나 침묵으로 해석하는 건 독재자의 업무로 남겨둘게 너는, 네가 아니라는 이 아득한 활주로, 나는 달리고 너는 받치고 나는 날아오르고 너는 손뼉을 쳐줘우리는 멀어지겠지만 우리는 한곳에서 만나지 그때마다 우리가 만났던 그 장소들에서, 어깨를 겯는 척하며 어깨를 기댔던 그곳에서 "좋은 위로는 어여쁜 사랑이니, 오래된 급류가의어린 딸기처럼"* + 소라게 한 마리가 집을 버리는 걸 우리..
나와 거북 1 문태준 거북 한 마리를 샀네그의 등때기와 목을 사랑하였네물속에 돌을 하나 놓았네앉을 데를 내주었네침묵이 생겼네돌이 두 개가 되었네굼뜨고 굼뜬 거북은물돌 밑에 살았네오늘 낮엔 처음 목을 빼나를 빤히 들여다보더니젯상의 병풍을 접듯물 바깥의 나를 접어겹겹의 주름 덩어리로 만들어하나의 주머니인 몸속으로천천히 지극히 천천히데리고 들어갔네생각 하나가 오그라지는 얼굴 하나가가슴속으로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네 ---- 나와 거북 2 문태준 시간이여,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사람에게 마른 데를 보여다오 아무도 없는 텅 빈집에 내가 막 들어섰을 때 나의거북이 작은 몽돌 위에 올라 앉아 사방으로 다리를벌리고 몸을 말리듯이 저 마른 빛이 거북의 모둔 소유(所有)이듯이 걸레처럼 축축하게 밀고 가는 시간이여, 마른 배를..
기념식수 이문재 형수가 죽었다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감자를 구워 소풍을 간다며칠 전에 내린 비로 개구리들은 땅의 얇은천정을 열고 작년의 땅 위를 지나고 있다아이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교외선 유리창에 좋아라고 매달려 있다나무들이 가지마다 가장 넓은 나뭇잎을 준비하려분주하게 오르내린다영혼은 온몸을 떠나 모래내 하늘을출렁이고 출렁거리고 그 맑은 영혼의 갈피갈피에서 삼월의 햇빛은 굴러 떨어진다아이들과 감자를 구워 먹으며 나는 일부러 어린왕자의 이야기며 안델센의 추운 바다며모래사막에 사는 들개의 한살이를 말해 주었지만너희들이 이 산자락 그 뿌리까지 뒤져본다 하여도이 오후의 보물찾기는또한 저문 강물을 건너야 하는 귀가길은무슨 음악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하는가형수가 죽었다아이들은 너무 크다고 마다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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