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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나타났다-이현승

_봄밤 2014. 1. 16. 14:16

늑대가 나타났다


이현승




 대화가 없는 식사란 이런 것이군

 침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늑대는 게걸스럽고

 늑대는 거칠고

 늑대는 무례하고


 그러나 당신의 식사가 식탁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듯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건 그 게걸스러움 때문이죠

 늑대의 식서아 앞에서 가족들의 식사는 용맹하죠

 악어의 입에 자신의 머리를 넣는 곡예사처럼요

 겁에 질린 낙타처럼 밥통을 꺼내야 할지도


 늑대는 늘 배가 고프고

 그러니까 늑대는 늘 도망 중이고

 결과적으로 늑대는 일과 휴식이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자신의 몸무게보다 무거운 식욕을 가지고 있지요

 -중력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세요


 식사 중 여행이거나 여행 중 식사이거나


 여하튼, 굶주림 없이 늑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곤란

해요

 포만감으로 충만한 노래하는 늑대를 본 적이 있나요?

 그건 늑대가 아니라 기타겠지요 기타만이 공복을 포만

감으로 바꿀 수 있어요 기타 부기 기타 부기

 기다림이 없이는 늑대를 이해할 수 없지요

 음악이라도 좀 틀어놓을까요?






 이것은 어떤 식탁의 기록, 식탁이란 내내 텅 비어 있다가 문득 가득 차는 공간, 가득하다가 또 조용히 텅 비어버리는 시간, 말하자면 일종의 음악과도 같은.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말없이 밥을 먹는 저녁은 온다. 숟가락을 들어 입을 크게 벌리는 순간, 우리는 홀연히 이해한다. 익숙하고도 낯선 시간을. 혹은 익숙하기 때문에 낯선 일상을. 늑대의 식욕과 포유류의 갈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래서 스르르 녹아가는 아이스크림과 같은, 그런 인생을.

 말하자면 이것은 식탁의 유물론이라고나 불러야 할 어떤 세계. 웃는 사람은 웃음에 지배당하고, 연인들은 헤어지면서 사랑을 이해하고, 지도는 만들어지면서부터 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의 식탁에서 유리병은 떨어진다. 둘러앉은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묻는다. 그런데 깨진 유리병은, 어디에 저렇게 많은 금들을 감추고 있었을까요?……라고. 오해와 오인과 어긋남을 그윽한 진실로 삼아 흘러가는 삶. 그러므로 매혹이자 그리움인. - 이장욱(시인)




이현승, 『아이스크림과 늑대』, 랜덤하우스, 2007. 뒤표지




추천사를 시로 쓰다니

지도는 만들어지면서부터 틀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깨진 유리병은, 어디에 저렇게 많은 금들을 감추고 있었을까요?


거의 『질문의 책이』라고 해야겠지. 




왜 목요일은 스스로를 설득해 
금요일 다음에 오도록 하지 않을까? 


「14」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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