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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안부-김소연

_봄밤 2016. 1. 24. 19:59



내부의 안부





김소연






 엽서를 쓰고 있어요 너에게 쓰려다 나에게



 오래전에 살았던 주소를 먼저 적었어요 엽서의 불

충분한 지면에 고양이가 와서 앉았어요 고양이가 비

킬 때까지 연필을 놓고 고양이가 비킬 때까지 연필이

제 그림자를 껴안은 채로 누워 있는 걸 바라보다 연

필과 연필의 그림자 사이를 기어가는 개미를 지켜보

았어요


 아침에 세면대 속에서 만났던 두꺼비에 대해 엽서

를 쓰려다 거울 속에서 보았던 검은 얼굴에 대해 쓰

고 있어요 친해질 수 없었던 얼굴과 친숙해져버린 천

한 사람에 대해


 빵 부스러기로 축제를 여는 개미와

빵에 잼을 발라 허기를 비켜가는 나 사이에

잠깐의 친분이 싹트고 있습니다


 엽서를 쓰고 있어요 너에게 쓰려다 나에게


 조금 전에 만났던 누군가를 조금 전의 감정으로 회

상하기 시작했을 때 엽서에다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요 그린 그림을 지우고 있었어요 지우개가 그림을 다

지울 때까지 연필이 제 그림자와 껴안고 누워 있을

때에 유서를 쓰려다 연서를 쓰게 된 사람에 대해 생

각해요


 뜨거운 물을 담은 물통을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고 쓰려다가

 이 방을 썼던 사람들이 견뎠을 추위가

 이불이 되어주었다고 쓰고 있어요





김소연,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친해질 수 없었던 얼굴과 친숙해져버린 천

한 사람에 대해'





어제 맥주를 먹다가 반쯤 쏟았습니다. 자는 곳 경계를 짓는 책담 일부가 젖었고, 아끼는 것을 곁에 두었기 때문에 순서 없이 읽는 책들이 공평하게 젖었습니다. 그 중에는 성경도 있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가장 밑에 층에 놓았던 것이 화근이 된 것일까, 두 손으로 펼쳐 놓았고 지금은 가장 윗층으로 피해 있습니다. 펼쳐 들었던 곳은 시편이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무릎으로 맥주를 닦느라 휴지를 많이 썼고, 늦게 들어온 동생은 수북한 휴지를 보며 혹시 감기가 걸린 것 아니냐 걱정했습니다. 제가 옮긴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겠죠.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일을 만들어 한 시간쯤 허둥거렸습니다. 


그 와중에 노트북을 신경쓰지 못했던 것은 맥주가 다행히(?) 책쪽으로 기울었던 까닭이고, 노트북에서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책상이 쓰러졌는데, 그래서 책상에서 떨어졌는데도(!) 노트북은 그 잔잔한 노래를 계속 트는 겁니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책상이 아니라 마음이 무너진듯 애지중이 받을었을텐데요. 지켜보고만 있는 마음의 책감에 아랑곳없이 노트북은 침착하게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좌식 책상을 바로하고 노트북을 올려놓았습니다. 맥주는 책이 먹었는데, 이미 취한 기분입니다. 


그런데, 왜 맥주는 쓰러졌던 걸까요? 겨울은 춥고, 내일은 월요일이고, 우울한 손가락으로 밀쳤던 것은 아닐겁니다. 나는 좌식 책상을 잠깐 들어서 옮기려고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거든요. 읽고 있는 책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라캉과 푸코를 읽는 책인데, 900페이지가 넘는다는 말로는 그 부피가 와닿지 않는것 같았거든요. 그것을 담으려다보니 프레임에 나의 생활이 끼지 않겠어요. 나는 치우고 싶었습니다. 다 먹은 물병과 이제 다 먹어가는 물병이 이 책의 두께 너머로 보였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는 포즈와 함께 책상이 무너졌고, 책상 아래 있던 맥주가 쓰러졌고, 주위에 책이 젖었습니다. 


사진은 없습니다. 아름답게 편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겠지요. 책을 읽고 쓰지 못해 두께를 보임으로써 읽기의 괴로움을 보이며 자랑아닌 자랑으로 지금을 면피하는 얄팍한 마음을, 보여주려고 했겠지요. '행복하여라!' 행복하려고 했을까요? 다행스럽게 책이 젖어 젖은 책들의 페이지를 한 구절씩은 보게 되었고, 그것으로 읽기를 다한 주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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