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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주황색 풍뎅이 자수

_봄밤 2016. 6. 15. 10:33




#퇴근 길 #버스 #강남만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피곤이 쏟아졌다. 내 앞에는 사십 분째 한 남자다. 검은색 옷에 주황색 풍뎅이 자수가 앞뒤판으로 빼곡한 티를 입었다. 풍뎅이가 꽤나 자세했고, 너무 많아서 조금 이상한 옷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지나서 그 남자의 팔을 보게 되었는데 털이 아주 많았고 붉은 빛이 돌았다. 그런데 그 털과 풍뎅이 자수는 꽤나 어울리는 것이다. 어울리는 옷을 입었군. 하며 있는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는 외국인이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주황색 풍뎅이 자수, 길고 붉은 털, 파란 눈. 조화롭다. 나는 버스에서 벌써 40분째 서 있는 중이었고, 내리는 사람은 없어도 모든 정차에서 사람들이 올라탔다. 한 이십분 전 자리에 앉으며 얼굴을 보여준 이 주황색 풍뎅이 자수의 남자가 내리지 않으면 그만 내가 내려야겠다고 생각한 차 그는 바로 그 정류장에서 내렸고, 40분을 서 있던 나는 앉아서 갈 일이 요원한 환승대신 40분을 앉아서 가기로 했다. 내려서 10분을 넘게 걸어야했다. 비가 왔다.


출발이 내일인데, 아직도 여행을 머뭇거리고 있다. 그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지금 내리는 비도 그중에 하나다. 내일까지 이어진다는 소식이 무겁고, 아무래도 괜히 렌트를 한 것 같고, 장마도 아닌 비에 수가지의 혹시를 생각하며 최악은 아무래도 비행기가 안 뜨는 사태다. 깊이 드는 생각은 여행을 아무래도 '망칠 것' 같다. 준비한 것은 그저 비행기표와 숙소 뿐인데, 도착할 곳만 있고 무엇을 봐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어느덧 취소 방법을 알아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취소 수수료는 고작 2000원이었다. 언제든지 취소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니. 코너에 몰려서는 어렵게 예매한 표를 취소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쉬운게 쉽다. 나는 좋은 여행을 할 자신이 없었다.


좋은 여행은 무엇인가. 좋은 여행이란, 애석하게도 좋아보이는 여행 같다. 좋아보이는 여행을 할 자신이 아주 없다. 여행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가져다 줄것이었지만 그 기대가 예전만 하지 않았다. 고작 삼일로 일상에 간극을 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해보였다. 뭐하러 가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잠을 자다 온다고 했다. 잠자러 가는 건가. 집에서 자지. 하는 표정이 나도 벌써 생긴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잠을 자고 싶다. 심지어 오늘 출근길 역사 안에서 딱딱한 나무 의자에 마르게 누운 어떤 아저씨의 잠을 조금 부러워 했다. 좋은 여행을 하지 못할까봐 취소 수수료를 알아보는 불쌍한 사람, 여행이야 완벽하게 망쳐주자.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다녀와도 좋다고. 그러자 천천히, 그럴리 있겠느냐는 기대가 찬다. 


결국 나는 여행을 갈 것이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집에 도착할 것이다. 조금 더 건강해 질텐데 그 삼일간 전에 없이 많이 적을 것이고, 많이 생각하고, 저녁에는 주황 불빛이 검은 바다에 자꾸 깨지는 것을 보고 기도도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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