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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맛

조촐한 피서

_봄밤 2016. 8. 8. 15:48


조촐한 피서


모든 돌을 검은색으로 바꿔서 이기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건 너무 깜깜하고, 아름답지도 않으니까. 이 판을 긍긍하는 건 내 돌이 모두 흰색으로 바뀌어 판에서 튕겨져 나가야 하는 사태를 막기위해서다. 수락한 적 없는 게임인데 언제 올랐는지 오셀로의 8*8개의 선에 돌을 하나씩 놓는다. 유리를 궁리한다. 최근의 그 궁리 끝에는, 그나마 갖고 있던 지분이 다 뒤집어져 "니가 '원래'갖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궁금하지 않는 진실을 대면하는 순간이다. 진 판이야 다시 추스려 깔면 되지만, 문제는 원하지 않게 초대되어서 심지어는 돈을 걸어야 하고, 모든게 쓸려 나가는 꼴을 봐야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 가족이라고 부른다.


소불고기가 그랬고, 교보문고가 그랬고,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에어컨 설치가 이 비극의 대미를 장식 할 것 같다. 모두 뭔가 잘해보려고 했던 일들의 목록이 늘어난다. 대단히 행복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지려고. 


찬이 없는 식탁에서 대화도 별로 없고, 하고자 하는 의지도 별로 없고 정신차리면 우리는 얼마나 더운지 알고 있는 단어를 모두 꺼내서 이야기 한다. 언젠가는 그게 '개'였다. 장을 보고 오는 길에 개가 옆을 지나가길래, 나는 머리카락 만으로도 이렇게 더운데 저 개는 얼마나 더울까 말을 건냈고. 이건 딱히 개를 빌미삼아 눈꼽만한 다행을 가져가려는 심사도 아니었다. 그저 '덥다.' 처럼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방금 지나간 개를 시작으로 우리는 점점 털이 길고 아름다운 개 이름을 말하며 여기 없는 개들을 가여워했다. 콜리까지 호명되었을 때, 그게 더이상 웃기지가 않았다. 콜리는 우리 상상 속에서나 덥고 우리는 여기서 진짜 덥다. 


그날 소불고기는 손쓸 수 없는 더위 대신 조금 바꿔보고 싶은 식탁이었다. 막연히 간장과 마늘 다진 것과 매실과 미림과 올리고당, 등등을 넣어서 버무리고, 대파를 좀 썰고, 고기를 센 불에 볶으면 소불고기가 된다는 깨끗한 여백의 설명이 이상한 용기를 줬다. 달짝지근한 갈색의 소불고기는 내가 아는 그 맛인 것 같다. 웹을 읽는 일은 너무나도 쉽지만 그것들이 얼마나 어렵게 게시된 것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노래는 버튼 하나 클릭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지금 듣는 이 단 한 번의 노래 뒤에는 수만번의 미완성인 노래가 쌓여 있다. 우리가 노래를 들을 때는 그것까지 한꺼번에 듣는 일일텐데 3분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버린다. 


그날 소불고기는 악몽같았다. 양념은 모두 버섯이 가져갔고, 불고기는 삶아진 고기일 따름이었다. 동생들은 욕도 못하고 먹었다. 소불고기는 맛있는 저녁을 차리고 싶은 노력이었고, 노력은 하지 않았을 것이 더 좋았다는 반성이다. 평소보다 더 맛없는 저녁, 저녁 없고 싶은 저녁. 나는 작은 노력들이 모여 지금 가진 돌마져 모두 빼앗아가는 일을 여러번 봤다. 왜 노력이 불행을 더 가져오는가. 그러나 문제는 이 노력이 '작다'는건 아닐까. 이틀테면 작은 노력이 작은 행복을 담보하는게 아니라, 생각보다 더 큰 노력이 작은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에어컨은 3일 뒤에 오기로 했다. 하루 밤을 또 보내고 보니 네 말이 맞다. 어젯밤도 땀에 젖은 머리카락, 오늘 밤도 그럴 것이다. 당장 오늘 받을 수 없는 에어컨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의민가. 나는 적당한 노력으로 적당한 행복을 타협하고 있다. 오셀로는 완전히 뒤집어지거나, 뒤집어지기까지의 시간만을 게임으로 쳐준다. 반반으로 아름답게 떨어지는 끝은 없다, 완전히 이기는 것은 아름답지않다는 등의 말로 기쁨 주위를 전전한다. 멀뚱히 서서 얼마 가지지 못한 것을 다 뺏기고 생이란, 원래 이 모양이라며 뭔가를 깨닳음을 기다리는 저 표정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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