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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

소란

_봄밤 2015. 11. 22. 20:03




네 시쯤 산책을 하러 나갔다. 일요일은 언제나 흐린 것 같다. 해는 이미 없었고, 해가 내려 앉은 온기도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베개 두개와 버릴 옷을 정리한 비닐 봉지를 든 채였다. 집 앞에 있는 녹색 수거함에 베개를 넣었다. 셔츠 몇 개도 넣었다. 한 개는 색이 바라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 번 입고 그 이후로 다시 안입게 되는 옷이었다. 다른 옷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재활용이 안되는 것으로 분류했다. '재'는 물론 '활용'도 마다한다. 나의 예전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쓰레기통에는 치킨박스와 애완동물 대변 패드같은게 있었다. 이 정도는 아닌데. 망설임 위로 버렸다. 한 번씩 모두 세탁한 옷이었다. 태우면 좋았을 것이다...몇 십번의 아침과 팔꿈치, 목넘김과 그때마다 보였던 얼굴 같은 것이 이 옷에 있다. 다른 것과 섞이지 않고 깨끗이 사그라들게 할 수 있는 장소를 생각했다. 죽는 것도 아니면서 갠지스 강 같은게 생각났다. 옷 화장장 같은 곳이 있어서 사람이 몰려와 제 옷을 태우고, 사라지는 시간을 기다리다가 헤어진다. 빨래방 같은 형태가 좋겠지. 옷을 버리고 걸었다. 더러운 강변에는 그림자도 잘 안졌다. 


소란을 생각했다. 계절이 시간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는 것을 소란이라고 한다. 좀처럼 말이 없는 네가, 언젠가 너의 소란을 내게 주었으면 좋겠다. 


어제 저녁 her를 다시 봤고, 이로써 확실해졌다. 이터널 션사인이 있던 자리를 그녀에게 내줬다는 게. 

her에서 테오드로가 물리학 책을 보며 사만다에게 전화를 하는 장면이 있다. 사만다가 요새 관심을 갖는 물리학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테오드로는 서문을 반도 못읽고 엄청나다며 말을 건넨다. 모든 것이 애처로왔다. 그 두꺼운 책을 그러모으고 읽고 있는거, 웃으며 전화를 하는 거, 사만다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까지. '함께'라는 말에는 성장과 건강이라는 뜻이 포함된다. '사랑'의 뜻도 그와 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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