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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

이불의 새벽

_봄밤 2015. 1. 4. 22:29




아무일 없이. 그러니까 단호한 결심같은 것도 없이 새해를, 그리고 한 살을 맞았다. 늘 가던 옥상에서의 밤도 없이 올라왔다. 눈에 들어차는 주황에 가까운 불빛이거나, 동 번호가 잘 보이는 멀리 길거너의 아파트라든가, 하루 이틀 사이 보름을 맞게 될 달같은 것을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런 밤을 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싶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아주 가까웠다. 쿵쾅쿵쾅 몇 번하면 금새 옥상이었고, 옥상의 바닥은 울퉁불퉁했다. 옥상으로 가자면 옥탑을 통과해야 했는데 언젠가는 세를 주었던 그곳은 창고로 눅진해가고 있었다. 옥탑의 문을 열면 사방이 트인 풍경이 있다. 멀리 황토색으로 깍인 산이, 그곳에 들어차고 있는 회색의 아파트가 스산한 바람을 불러오는 곳이었다


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잘 부는 날에는 빨래를 널러 올라갔다. 빨래 줄이 엉성하게 몇 가닥 엮어 있었고, 그것으로 모자를 것 같으면 아예 건조대를 가져와 널기도 했다. 가끔 인형 옷처럼 작은 옷이 줄지어 나부끼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양말이며, 손수건이며 팔다리 어디고 모두 짤뚱한 옷이었다. 그것에는 그만의 비율이 있었고 그것만 펴 놓고 보면 작다 뭐하다는 말 필요없이 사람의 것이 분명했으므로. 나는 그것을 가리켜 대견해 하거나, 슬몃 웃어 보이는 얼굴을 고쳐야했다. 


올해 일흔을 바라보는 빌라 주인은 지져분하게 놓는 물건을 치울 줄 몰랐다. 계단 앞에 포개져 있는 소쿠리,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의 화분, 몇 개의 장독, 옆구리가 터진 캐리어. 그런것이 계단 한쪽에 줄을 세워 옥상까지 이어졌다. 


하루는 옥상을 오가는 계단에 스티로폼 상자가 놓여있어서 그걸 크게 뛰어넘어 내려온 일이 있다. 집주인은 불편하게 이걸 오가는 길에 놓았구나. 그걸 들어 가생이에 옮기려 했다.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 상자였다. 고개를 들자 층계참 벽에는 직사각형만큼의 창이 있었다. 그곳으로 들어오는 새하얀 달빛이었다. 


달빛은 시간에 따라 달리 내렸다. 그러나 손꼽아 시간을 따져서 달빛을 구경한 일은 없다. 어쩔 때는 생기고 어쩔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을 궁금해 했으나 내가 또 오래 생각한 것은 그것을 스티로폼 상자라고 여겼던 눈과 마음의 태도였다. 서로는 자신에게 타당한 이야기를 내놓았다. 손으로 들어올리기 전까지. 나는 스티로폼 상자 안에 들었을 무엇과, 그것을 담았을 시간을 상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수산물을 담았을 것이다. 옆집의 저녁을 푸짐하게 꾸렸을 스티로폼 상자. 멀리서 올라왔으며 상하지 않도록 얼음이 채워져 있었을 상자. 그것을 꾹꾹 눌러담았을 빨간 고무장갑의 손. 상자를 내주며 오갔을 몇 마디의 말 같은 것. 그러나 그것은 창을 통과해 내려온 손에 잡히지 않는 달빛이었다. 눈과 마음의 확신과 단정을 가르고 손만이 알 수 있던 사실이었다. 

 

방을 치우고 이불과 옷가지를 가려 빨았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사이 두툼하게 쌓인 이불을 살펴 나는 베개 하나와 이불 하나를 버리기로 했다. 언제 샀는지 잘 생각도 안나서 조금 속상했고 언제가 생각도 나지 않을만큼 오래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또 조금 속상했다. 다시 새 것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이불을 안팎으로 살폈다. 이불을 내 놓기로 한데는 우선 바랜 색 때문이 컸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후에 일었다. 그러자 이불은 터진 곳을 금방 보여주었다. 천이 헤져서 안에 있는 솜이 다 드러났다. 부드러울수록 헤지기 쉽다는 것, 부드러울수록 빨리 닳는다는 것. 부드러워지기 위해 이 만큼의 수명을 갖고 태어나는 것. 


은은한 분홍색의 아마도 내가 사기를 처음 했던 이불이었다. 베개는 그 다음번 장만했던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헤져서 머리가 닿는 곳이 다 틑어져 있었다. 나는 그들을 모른 척 한 번더 깨끗이 빨아 덮을 수도 있었다. 기울 수도 없는 틈에 세찬 물과 향기를 내처 돌려 다시 한 번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고 싶었다. 그러나 이불과 베개는 부드러운 나머지 부드러움이 부서지는 지경에 와 있었고 내가 한 번 더 그들을 안고자 했을 때. 그들은 한 번 더 크게 찢어질 시간을 마주하고 있었다. 


내려왔던 그 계단, 착각했었던 그날을 크게 뛰어넘지 않아도 지나오게 된다. 익숙한 옥상의 밤을 보러가지 않았던 나는 수거함에 도착해 베개를 밀어 넣고 있었다. 부드러운 것이 부서지는 지경에 오도록 아낌없이 살결과 닿았던 시간들을 둥글게 말아 수거함에 힘껏 밀어 넣고 있다. 수거함은 입구가 좁아서 이불을 다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바닥에 놓을 수는 없었다. 입구를 막은 채로 두고 나왔다. 초록색 의류수거함에 분홍색의 이불이 헤실헤실해진 끼워져 있다. 아마도 이불로 생겨나서 처음 맞는 새벽일 것 같았다. 솜마다 얼음이 들어차는 일월, 때는 마침으로 보름의 큰 달이 뜨는 날이었다. 이런 대구로 서로의 끝을 이루니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하남이라는, 강의 남쪽이라는 이름의 도시를 지나고 있다. 달은 이곳에서도 보름이었으나 나는 다시 그와 같은 분홍색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손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확신임에도 다시 조심스럽게 믿고 싶었다. 후에 손이 그와 같은 결의 분홍을 확인하게 된대도 오늘 마음의 적어둔 일을 가려두고 싶지 않다는 다정을 '손'이 적고 있으므로. 


나는 해를 지나와 종내의 부드러움이 말린 이불의 새벽을 걱정하고 그 안에 또한 둥글게 말려 들어가 있는 나의 잠과 아픈 낮을 떠올린다. 다른 이불에 덮어 자는 밤이 아주 캄캄하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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