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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 하나의 사진을 찍는 순간, 당신의 이른바 '결정적 순간'은 계산될 수도, 예고될 수도, 사고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란 쉽게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물론이죠. 늘 사라져 버리지요. 그가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일 초의 몇 분의 일인 그 순간을 어떻게 압니까.

 데생에 대해 말하고 싶군요. 데생은 명상의 한 형태입니다. 데생하는 동안 우리는 선과 점을 하나하나 그려 나가지만 완성된 전체 모습이 어떤 것일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데생이란 언제나 전체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의 여행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사진 찍는 것은 그와는 반대가 아닐까요. 사진은, 찍는 순간, 설혹 그 사진이 어떤 부분들로 이루어지는지조차 모르는 경우에라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순간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선생 자신의 모든 감각이 최대한으로 예민하게 가동된 상태, 다시 말해 일종의 제육의 감각-제삼의 눈이라고 그가 거들었다-으로부터 오나요, 아니면 당신이 마주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메시지인가요?

 그는 낄낄 웃으며 -마치 동화 속 토끼가 웃는 것처럼- 무언가를 찾으러 몸을 옮기더니 복사된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이게 바로 내 답이요.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이죠.

 거기에는 자신이 손으로 베껴 쓴 글이 적혀 있었다. 받아서 읽어 보았다. 1944년 10월,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자 막스 보른의 아내에게 부친 편지에서 인용한 글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연대감은 너무도 커서, 한 개인이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죽는가는 내게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p. 65.



존 버거, 김우룡 옮김,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열화당, 2005년.





카르티에-브레송과의 대화.


글이 이렇게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는 뭘까. 손가락이 페이지를 이유없이 오간다. 고를 필요가 없으므로 손가락은 어디든 멈출 수 있다. 읽다가 또 멍하게 생각한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걸까. 아름다움을 감탄만하기에 나는 어리지 않아서 이제는 왜 그런지를 생각하는데. 세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 쓰는 말이 역시 그렇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고. 세상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글이 그래야 한다는 말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진부할 따름이다. 진부하기 때문에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하든, 그 밖에 무엇이든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움을 끄덕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고, 그 힘이 저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있듯 내게도 있을까를 탐구해 보는 일이 괴로워 의미 있겠지 싶다. 내가 느끼고 싶은 연대는 문장을 제 1시약으로 삼아 수만 색으로 진동할 마음인데, 일을 하니 책을 볼 시간이 없고 책을 보지 않으니 느낄 시간이 없다. 진부한 핑계다. 만나려고 한다면 만나지 못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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