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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궁리에서도 알기 어려운 것들은 대개 시간이 만드는 고통과 관련있다. 그때가 돼봐야 진심으로 알 수 있으며, 지금은 조금도 상관 없다는 것처럼 짐작도 할 수가 없다. 예컨대 할머니가 KFC에서 닭 사는 방법 같은 것 말이다. 이 평범한 장면에서 나는 무척 고통스러웠다. 사실 장면은 아주 상투적인 구성이다. 애들이 좋아하는 닭을 사면서 미군부대의 젊은, 흑인 혼혈 군인을 만나야 했고, 소영(윤여정)이 그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장치처럼 마련된 에피소드였으니까. 이 짧은 사이, 쩔쩔매는 주문을 하는 할머니가 내가 되는 것을 보았다. 하프로 사야할지 점보로 사야할지, 요만한 아이랑 먹으려면 어떤 사이즈가 좋은지 모른다. 할머니가 된 나는 언젠가의, 여러명의 나와 함께 있다. 


이 닭을 집에서 기다릴 어릴 적의 나, 점심을 먹기 위해 간단히 햄버거를 주문하며 사이드로 닭다리를 시켰던 한창의 나, 또는,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만든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가는 도중에 주문할 언젠가의 나. 이렇게 서너명이 매대 앞에서 서서 닭을 주문하지만, 어린 캐셔, 메뉴얼대로 닭을 읊으며 시급하게 일하는 이에게는 오로지 할머니의 모습만 보인다. 그러므로 현실이란 다시 만들 수 없는 것.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화면에는 자신의 최전선에서 역시 할머니를 처음 살아보는 여자, 할머니, 윤여정이 있다. 


착취의 제일 아래, 저기 바닥에 있는 소영(윤여정), 현대사에서 목소리가 가려졌던 이가 화면의 중앙에 섰다. 그녀의 약력은 한결 같아서 식모, 공순이, 미군 부대 양공주, 흑인 군인과의 삶, 아이 입양, 그리고 지금은 박카스 할머니다. 젊었을 때는 아직 젊으니까, 라고 뭉게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65살, 모텔비 포함 4만원 하는 성매매에 월세를 내고 빚을 갚는 생활에는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모텔비 포함 4만원이라는 말도 안되는 '가격'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박카스 할머니를 살 노인들도 소일 없어 공원에 자신의 하루를 내놓는 이들. 노년이란 참으로, 뒤 이을 수 없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줄서는 것이었다) 그녀는 있지도 않은 잘난 아들을 만들어낸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 유학비를 댄다고 둘러대는 콧대 좀 보라지. 그런 말을 듣는 '오빠'들은 나중에는 그래도 호강하겠구만, 이라는 생각과 함께 여자를 돈 주고 사는 죄책감이 옅어질 수 있는 일인지. 소영은 자신이 무참해지는 순간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기에 작은 순간에도 존엄하게 있기 위해 배로 애써야 하는 걸 잊지 않는다. 그런 생활에도 '연애'하자고 말을 건넬 호기가 있다. 수근거리는 소리지만 '죽여주는 여자'라는 별명이 그녀를 또각 또각 걷게 하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 대놓고 말할건 못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녀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같은 옥상 아래 살고 있는 트랜스젠더 티나, 무릎 아래가 없는 피큐어작가 청년 도훈, 그리고 어제 '주어왔다'고 이야기 하는 필린핀 혼혈아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이렇게 모여 살게 된, 그러나 누구도 업신여기지 않고 서로의 얼굴 그대로일 수 있는 한 귀퉁이를 얻어 '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가슴팍에 가위를 찔러 넣으며 배신을 찾아온 필리핀 여자가 도착한 곳이 산부인과, 원장이라는 사실은 블랙 코미디같다. 소정은 임질에 걸렸고, 이것 때문에 일을 쉬어야 했고, 지랄같은데 반들반들한 의사는 그녀를 대충 진료보면서도 병원은 만원이다. 그러나 업보란, 제가 일보는 병원에서 칼을 맞기도 하는 것. 시작은 상쾌했으나, 그래서 필리핀 혼혈아와, '싸질러 놓고 책임 지지 않는 한국 남자들'을 잠시 겨누는 듯 하다가, 세간이 말하는 단순한 가십으로만 소비한다. 여성의 신화적인 모성애에 기대 아이를 '납치'해 오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여성에게는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죄인의 모습이 되는 것. 이런 질곡에서 그녀에 기대되는 감정이 어디 이것 하나뿐일까. 같이 살며 아이까지 낳았지만 헤어졌던 그 흑인 군인에 대한 감정, 아이 하나 키워서 살수 없게 만든 사회에 대한 감정, 얼굴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가락들에 대한 감정들. 모두를 소거 한 채 이것이 가장 중요한 감정입니다. 소정의 목에 걸어주는 뻔함에도 윤여정은 저 만의 페이소스로 빛난다. 세상에, 청카바에 짙은 장미색의 루즈가 촌스럽지 않고, 한올한올 파마한 머리를 빗어넘기며 일상을 살아낸다. 


영화는 오로지 노년의 삶에 초점을 맞춰도 괜찮았을 것이다. 노년의 성性과 죽음에 대해서.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노년과 맞닿은 죽음은 결국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마주한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어지는 시간에는 죽음을 홀로, 주체적으로 맞는 것은 쉽지가 않다. '24시간 간호, 산소 흡입기, 영양 공급관이 필요한 삶***'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동정의 마음에서 찾았던 세비로숑에게 그녀는 죽여주는 여자에서, 정말로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는 노인들의 세 번의 죽음에 말 할수 없이 쓸쓸하지만, '죽여주는 여자'라는 타이틀을 본인이 원하지 않는 사이 두개나 지게 된 소영에게는 대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모르겠는, 황망함 뿐이다. 이들은 홀로 죽을 수도 없어서 성을 파는 여자에게 죽음까지도 의탁한다. 아무리 예의바르게 부탁한대도, 저 여자에겐 '그래도 된다'라는 감정을 읽는다면 막다른 이에게서 너무한가. 그러나 정말 너무한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게 된 소영이다. 이렇게 손 쓸 도리 없이, 아니 손 쓸 사람 없이 무너지는 노년이,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라니.


'목적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

그것을 견디게 되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앞이라면 '지금도 늙고 있어'라는 대화를 무색하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 뼈는 뼈라는 것을 스무살 때 알았어도 늙음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은 마련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내가 먼지를 불어 내고 자리를 맞춘 뼈들이, 곧 내가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으나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뼈라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머리를 숙였던 여러 죽음중에 삶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도 있었으나,

내 안에 쌓이는 시간을 받아들일 것. 몸과 마음의 변화는 미리 알 수 없겠지만 노쇠한 것도 나의 삶이다. 좋은 죽음이란 어느날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해 나가는 일일 것. 영화는 짧은 시간 참 많은 것을 훑고 지나갔다. 영화를 본 보통의 이들에게 노년에 대한 환기를 주었다며 그것이야 말로 나쁘지 않은 별점이다. 보통 이들의 대단한 관심은 곧 어떤 연구의 영감이 될 수 있고, 어떤 정책의 시작 일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육아서가 해를 지치지 않고 나오는 것처럼, 노년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결국 얼마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느냐가 결정할 것이다. 평범하게도 이런 것들은 보통이들이 '생각'해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죽여주는 여자>는 그 생각의 문을 참 이판사판 열지만, 그 안에 윤여정은 사진으로만 스쳐가거나 짐작으로만 흩어지는 삶의 바닥, 을 살아온,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삶을 살았던 여자'들'의 표정을 지으며 어떤 요일에는 늙어 있을 수 밖에 없는 모든 사람, '에브리맨'을 이야기한다. 두 세대가 지날 동안 제대로 불리지 않았던, 스스로 말할 수 없이 이름만 몇 개였던 여자들의 목소리로 말이다. 







*, **, **** 필립 로스, <에브리맨>

***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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