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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몰래 나와 언제나 머물고 싶었던 방, 우리만으로 전부였던 공간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얼마나 눈빛으로 가득했는지. 그곳은 틀림없이 중심에서부터 한없이 커지는 원이었다. 언제나 풍족했으며,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곳은 어떻게 해도 원의 끄트머리, 그믐의 달처럼 '겨우' 빛날 수 있었던 공간임을 알게 된다. 아델과 엠마는 여기, 서로가 작게 교차했던 곳을 우주처럼 여기며 뛰어들었다.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터널인 듯 황홀했지만, 우리가 교차할 수 있던 지점은 나의 아주 일부일 뿐이란 걸 알게 되었을때, 각자가 가진 원의 중심이 다른 곳을 향해 미끄러질 때, 우리의 작은 방은, 사랑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너는 어떻게 걸을 수 있겠는가를 말한다. 아델이 온몸으로 말한다. 


이 둘이 사랑에 빠질 무렵 엠마는 사르트르를 들며 아델에게 자신을 설명한다. 자기가 만들어온, 만들어갈 방향성을. 아델이 들어보니 그를 모르지만 밥 딜런과 비슷한 것 같다. 엠마에게 비친 무심한 아델의 표정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자신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의 얼굴이었다. 고등학생 테두리 안에서, 사르트르를 밥 딜런으로 이해하는 그녀가 귀여워서 견딜 수 없는 엠마의 얼굴이 아델의 얼굴 위로 겹친다. 사랑의 시작인가. 그러나 시작과 함께 관계는 여기서부터 삐걱인다. 분명히 사르트르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밥 딜런으로 이해한다. 


저녁은 주로 스파게티. 간단하게 조리하며 배가 부른 실용적인 요리를 먹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는 것이 보편적인 삶이라고 믿으며 굳건하게 이뤄진 이성부부와 딸로 이뤄진 아델의 집과 화이트 와인과 레몬즙을 뿌린 굴, 배부름보다 향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 온 집안을 차지한 예전 아버지의 그림들, 예술적 영감을 바탕 삼아 자신의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이라고 믿는 엠마의 집. 이들 집의 부모들은 자신의 딸과 너무나 다른 여자아이의 방문을 반기면서도, 의아스러워한다. 어떤 것을 전부로 여겨 이끌리는 마음이 나이든 사람에게는 보인다는 듯이.


그림을 그리는 엠마의 모델이 되면서 아델은 엠마의 영감이 되지만, 자신을 모델 삼아 그린 그림 앞에서도 '멋지다' 혹은 '굉장해' 이상의 말을 할 수 없다. 이건 공교롭게도 아델이 그만 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남자와의 관계와 겹친다. 아델의 아름다운 외모에 끌렸지만 그는 아델에게서 너무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는 전 생애을 노력해도 아델이 좋아하는 책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델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책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된 아델. 자신이 '가짜'라는 감정을 확인할 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이 역전되어 아델이 그 남자선배에게 느꼈던 수순을 이들 커플이 고스란히 밟는다. 일상적인 직업이나 생활 외의 도전, 그러니까 좀 더 내면적인 것의 성취를 제안하는 엠마의 말에 아델은 상처를 받고, 창작하는 괴로운 기쁨을 공유 할 수 없는 엠마의 말은 갈 곳을 잃어버린다. 엠마가 먼저 확인한 비좁은 관계의 교차. 그녀는 아델을 곧 견딜 수 없게 된다. 


사랑의 시계는 함께 성장할 가능성을 동력삼아 미래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함께 성장할 수 없는 관계는 멀리 갈 수 없다. 속도와, 보폭과, 저기까지, 라고 말할 수 있는 목표를 함께 할 수 없다면. 그러므로 아델에게 '무한한 애틋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엠마의 말은 아프다. '지금 사랑하지 않아'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한한'은 밀도를 정하지 않은, 대기에 퍼진 수증기처럼 아련한 마음의 크기 일 뿐이다. 나의 지금, 이 시간과 장소을 비워두며 시계를 함께하지도 않는 감정은 아무런 힘이 없다. 


사랑의 처음과 끝을 밀도 높게 그려낸 매혹적인 영화가 끝나면 당신은 지독한 허기에 시달리게 된다. 즐겨하지 않는 토마토 스파게티 생각이 간절해질 것이다. 입술과 턱께를 자꾸 닦아내는 식으로, 세상 맛있게 훔치고 싶어질 것이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아름답고도 지루한 사랑 영화다. 어떤 사랑도 세 시간만에 이야기 될 수는 없겠지만 그 어떤 사랑얘기라도 듣는 이에겐 결국 지루해진다. 그러나 그런 사랑을 한 이들에게는 몇 번이라도 똑같이 지겹게 사랑하고 말 지독함일터. 도저히 연기라고 믿을 수 없는, 사랑이란 감정으로 자신의 나이를 살아버린 이들의 얼굴이 스크린에 아프고, 온 몸을 받치고 마는 수위 높은 섹스에 갈증이 나고, 당신이 잘 모를 것이라는 레즈비언의 사랑이래도 사랑은 똑같다. 영화는 생각 이상으로 우리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보편한 이야기를 얼마나 진짜로 그려내며, 사랑 이후의 성장한 '내'가 어떻게 연인 없는 거리를 걸을 수 있겠는가, 언젠가의 미래를 눈물도 없이 담담하게 그린다. 그건 영화를 보는 이의 몫이겠다.






이 밖에도 프랑스 영화가 보여주는 '프랑스'적인 것들이 새로웠다. 가령 국어시간에 문학작품을 갖고 수업하는 방법. 학생들은 돌아가며 책을 읽는데 교과서가 아니라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다. 선생님은 주인공이 가진 '느낌'에 대해 묻는다.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게 뭘까? 학생들은 이 질문에 고심해야 한다. 침묵 후, 어떤 이가 '후회감'이라고 대답한다. 선생님은 학생에게 후회감이란 또 무엇인지 묻는다.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사이 '후회감'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진다. 고등학생이 친구들과 시위에 놀이하듯 참여하는 거라든지, 미대에 다니는 엠마가 사르트르의 말하며 자신의 기치를 넌지시 말한다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사는 아델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동성을, 화려함을 선망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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