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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운명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20160704_inmunstudy143


2강을 듣고 정리.



주요 키워드

감각적인 것의 나눔

중지(서스펜스)


감각적인 것은 재현 되었다가 변화되고 미학적인 것이 된다. 새로운 것으로 배치되고 전환된다.

감성의 분할, 윤리적 체제를 논의한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영화와 연결한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책이 있다. 추천. <감성>은 좋지 않은 번역이다.


(아래의 책이 맞는지 모르겄음)



재현적 체제와 미학적 체제


재현적 체제에서 예술은 '진실임직한 것'이어어야 한다. 주제에 대한 동의가 필요하고 주제마다 품격, 위계가 있다.

이렇게 되면 예술에 대한 규범, 형식들이 생기는데, 그것들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그 시대의 규범이 좋아하는 것)-즉 이것은 다시 예술의 자율성이 문제가 된다.

문제 제기: 모더니즘(1930~40년대)시기


그러나 미학적 체제에서는 어떤 것이든 누구든 이야기 할 수 있다.

예술가-라고 하는 분별이 없어진다. 때문에 평등과 연결됨.


*랑시에르는 우리와 다른 시간관념을 이야기 한다.


아날학파의 시간구분

단기(주로 우리가 구분하게 되는 시간)

중기

장기(지속되는 시간)


: 재현적인 것에서 미학적인 것으로 이동하는 것은 어느 시점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중기나 장기의 시간처럼 어떤 흐름이 이어지다가 끊어지지만 어느 시기에 다시 나타난 것도 있다.


실러의 문제



실러는 감성과 이성이 같이 발현될 때를 미적인 상태라고 봤다.

(어떤 내용을 생각하거나 해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자마자 알게 되는 것, 즉 형식만이 진정한 미적인 것으로 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미적인 상태는 우리의 일상을 '중지' 시키는데,

지속적으로 현상되는 것을 깨뜨릴 때 새로운 것이 가능해지고, 랑시에르는 이것을 '정치'라고 말한다.


이미지의 운명 1장


1장은 난해하다 3장부터 읽을 것을 추천.


이미지는 어떤 의미와 대응하고 조응한다. 라고 보는 것이 재현적 체제라면,

이미지와 어떤 의미가 분리되는 것이 미학적 체제다.


이미지는 단순한 복사본이 아니다. 이미지는 사물이 말하고 침묵하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고 침묵하는 것은, 순차적으로 일어나거나 그런 개념이 아니라

예를 들어 보여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등.


여기서 <해방된 관객>가 맞닿는 부분은



사물-저자-번역-책-독자 의 도식에서 재현적 체제가 저자의 번역이나 글의 의도에 맞게 독자가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면

책-독자의 사이 독자가 다시 재번역하는 것, 을 미학적 체제로 이해하면 된다.


사진은 왜 예술이 되었나?


익명의 사람이 무언(침묵)으로 증언하기에 예술이 된다. 이미지 전체에 숨겨진 비밀의 보유처.

여기서 바르트와 밝은 방의 이야기를 한다.



스투디움과 푼크둠

바르트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스투디움은 정보전달. 푼크툼은 촬영자의 의도가 소용없고 감상자에 맞게 해석되는 것. 바르트는 푼크툼을 우위에 둔다.


24, 25p 오역 고백


생각에 잠긴 이미지. 생각에 잠긴 이미지는 능동과 수동 사이, 미규정된 상태다.

생각 되지 않은 생각. 연결되지 않아도 연결되지 않는 생각.


예술과 정치

정치의 미학, 혹은 미학의 정치에 대해.


예술로 뭔갈 할 수 있는 건 끝났어. 라고 말하는 할 포스터에 대한 비판.



예술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유용한 것이다.

예술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미적인 것을 늘 소비한다. 때문에 그것을 분석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불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추천.


 


말과 정의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말을 하고 있지만 말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말이 있다.


정의는 혐오를 설명할 수 있는 한 축이고,

감각과 밀접하다. 또한 이것은 평등과도 직결되어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의는

개인의 가치에 맞게 분배되는 것이다

부정의는 개인이 가진 가치 이상을 탐하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개인의 가치에 맞게 배분하는 것의 문제가 생기는데,

배분 문제에는 다시 두 가지 개념이 있다.


교정적/ 배분적/ 이것을 랑시에르의 말로 바꾸면

산술적 평등과 기하학적인 평등이 된다.


교정적(산술적 평등)은 손익의 평등이다.

배분적(기하학적 평등)은 공유물을 배분할 때 각자의 가치에 맞는 몫을 기하급수~적으로 나눠 갖는 것이다. 이 기준에 맞게 비례해 분배한다.


이것은 공동체에 대한 기여 정도에 따라, 개인이 갖는 가치에 따라

소수자들, 선한 사람들, 민중 으로 다시 셋으로 분류가 가능한데,

소수자는 왕 선한 사람들은 귀족, 그리고 민중은 민주주의 체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부는 산술적인 평등에 기초하고, 최선의 사람(선한 사람)이란 부자들을 뜻한다.


그리고 민중은 자유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유만 갖고 있다. 차지할 수 있는 몫이 없다. 그런데 이들이 공권력을 요구하는(방해)일이 벌어진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민중이 잘못한 일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사태는 민중이 자기 목소리를 낼 때
기하학적인 평등이 존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근본적인 잘못이 드러난다.


이점에서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높이 평가한다.


그렇다면 오로지 대립할 때 정치가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빈자와 부자가 산술적인 평등에 따라 대등하게 구분하면 불평등이 해결되고, 이때 정치는 일어나지 않는다.

중단, 방해, 잘못으로 기존의 분배(문제)를 들어 낼 때 정치는 존재한다.


이것을 계급투쟁이라고 하는데, 이때 계급 투쟁은 계급과 계급의 투쟁이 아니다


드러내는 것. 이것이 정치다.


이것은 요새 혐오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역자는 두 가지 일화에 깜짝 놀랬다.


1. 세대 차에 따른 가부장제 인식.

역자의 나이는 40대 중후반. 30대 중반의 남성이 말하기를, 가부장제로서 차별이 지금의 40대 중반에게는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 우리(30대 중반)세대는 아니다. 남녀는 평등하다는 인식. 불과 10년의 나이차와 가부장제 인식에 대해서.


2. 정의당 사건.

최근 메갈리아 관련 넥슨에 대한 논평을 냈었다. 그리고 이 논평 밑에는 '철회 댓글'과 '철회 하지 않으면 탈퇴'하겠다는 댓글이 다수 있었고,

진보정당으로 알려진 정의당은 논평 철회 성명을 낸다.


: 이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뭘까?

산술적 평균/ 진보정당인 정의당을 정치에서 이용하지 않겠다/ 이들은 중단하지 못하고 치환만 하고 만다.


질문>

강의와 랑시에르의 말에 따르자면 현재 여성의 운동?은 현재 흐름의 '방해'이며

이것은 즉 '정치'를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혐오를 다시 혐오로 받아 무언가를 바꾼다는 것이 가능할까?


답>

혐오를 혐오로 받는 것이 여기서 중요한 문제인가?

혐오를 드러나게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사실 랑시에르는 이 사안을 본다면 비판할 것. 프랑스는 이주자 혐오가 큰 사안인데,

이주자의 편을 들긴하지만 그들의 대응 방법을 모두 긍정하지는 않아. 극단적으로

어쩌면 적과의 동침처럼 서로 자기 세력 강화만 가져올 수도 있다.


사실 넥슨 문제는 많은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티셔츠를 올린 성우는 노동권에 대한 문제가 있었지만 사측과 합의 되었고, 성우가 메갈리아를 지지하는 부분도 조건부.

그리고 티셔츠를 샀다는 것, 메갈리아를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그러나 정의당의 성명에서 그들이 메갈리아를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댓글이 메갈과 연결지어 이야기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혐오를 혐오로 받는 것이 중요한가? 드러내진 것을 봐야하지 않을까?



강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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