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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인문 사회

곡성을 보고

_봄밤 2016. 5. 29. 19:19


곡성을 보고 




맨 처음 든 생각은 '왜 이렇게까지'였다. 왜 이렇게까지 진흙탕을 보여주는가, 피칠갑을 보여주는가, 좀비와 시신과, 목청을 귀에 갖다 꽂는가. 곡성은 한땀 한땀 감쳐간 바느질 솔기를 다 비춘다. 바늘이 뚫고 간 흰 면보, 씨실과 날실의 구멍이 적나라하다. 그 구멍은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이렇게 어둡다. 이렇게까지 보여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왜 굳이 그렇게 보여줘야 하는 걸까. 스타일의 문제는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이런 장치들이 과연 '본연'의 이야기를 위해서라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장면은 '정황'만 보여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 120%이상 기합이 들어가 있다. 모든 장면이 과하다는 느낌. 이쯤 되면 서사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게 된다. 기어코 눈앞에 보여주려는 연출에는 의도 이상의 수 많은 떡밥이 있어 잘 잇기만 하면 되지만 그러나 영화는 공정하지 않아, 가장 보여주었어야 했을 무명의 분량을 생략했다. 독자가 간취할 수 있는 고리가 거의 없었다. 마땅히 보여줘야 할 서사는 중간 중간 빠져있거나 설명이 없고, 구태여 보여주지 않아도 될 장면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있다. 


욕심이 많은 영화는 유머 또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가장 어처구니 없이 웃겼던 장면은 마을 주민 박모씨가 좀비로 변해서 역시 마을 남자 여섯과 싸우는 장면이었다. 어이없는 난장이다. 어렵게 살아난(?) 박모씨에게 줄 것은 장면을 소비하며 까닭없는 죽음이었다. 그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외부인을 쫒는 추격적인 벌어지지만 이것은 1과 2처럼 우연적인 순서지 인과인 것은 아니다. 영화로서는 이런 마음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야무지게 만든 영화에 관객이 좀 웃기도 하며 봤으면 좋겠는데, 좀처럼 웃지 않는 표정일 것 같군. 

이때 안심했다. 영화는 스스로 B급 좀비물로 장르를 변환해 스스로 웃었다. 나는 바로 이 점이 웃겼다. 


황정민의 연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정말 굿판을 보는 것 같았다. 


곡성이라는 곳이 실제 있을까? 이곳엔 도무지 인간의 이성과 기술의 발달이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게으르다. 아무리 이 깊은 골짜기의 농가라 하더라도 마당이 진빠지도록 물길을 봐두지 않는다. 새벽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핸드폰으로 받지만, 핸드폰은 그뿐으로만 사용된다. 사진을 찍는 일은 있지만 그것을 전송하는 일은 없다. 전송할 곳이 없거나, (설마)전송할 줄 모르거나.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은 외부를 알지 못하며, 외부의 도움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도움을 요청하는 곳이 기껏해야 성당이거나 침을 맞는 것이며 가장 큰 도움은 다름아닌 무당에게서 온다. 

 

시소의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잘못된 시소는 언제나 기운다. 영화는 시소가 왜 이런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자신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밸런스 붕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차를 운전하면서 전화하는 씬은 필요하지만, 그 전화로 전화 이상의 조작을 하는 것은 안된다? 몇 만명이 봐도 좀처럼 기울지 않는 쪽에 올라탄다. 잘 된 영화로 남을 수는 있겠지만 잘 된 이야기로는 남을 수 없을 것이다. 


믿음에 관한 이야기도 역시 노골적이다. 보는 것과 믿는 것: 보지 못함에도 믿는 것, 봤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는 것. 어떤 영화로 남아도 곡성에게는 상찬이다. 그러나 제시한 문항이 이렇게 두 가지 밖에 없으니, 이 영화는 얼마나 자신에 차있는 걸까. 관객에게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를 보고 싶다. 영화가 가진 욕심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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