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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맛

뭐라고 해야 할까

_봄밤 2016. 5. 9. 00:05


꺽쇠는 특별해

<생활코딩>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노트북이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못가져갔다. 그래도 오랜만에 노트를 들고 듣는 시간은 전에 없이 풍요로왔다. 이고잉샘은 '공대(생)은 아름다운 것을 어떻게 말할까'라는 문제에 있어 더 없이 좋은 답지였다. html로 짜여진 코드들. 컴퓨터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공용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코딩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가르치는데서 진심이 느껴졌다. 아직은 이국의 기호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 코드들이지만 언젠가 질서정연함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날도 있을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고 해야할까. 요새 나는 틈틈히 코딩 수업을 듣고, 따라해본다. 



에이가 없네

웹페이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링크인데,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적나라하게 말하면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링크가 없는 웹페이지라니. 클릭이 일어나지 않는 단일한 창이라니 얼마나 매력없니. 링크는 코드 <a>로 표기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시를 들어본다. 이 블로그는 <a>가 없는 웹페이지다. 인터넷에서 둥둥 떠다닌다. 어쩌다가 충돌처럼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대개 불시착 했고 금방 떠난다. 어디론가의 길을 제시하지 않는 블로그. 유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블로그. '에이가 없네.' 그렇다. 

문제점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잘 안되는 것을 적어놓으려고

그래서 한 달에 한 편의 글을 쓰기로 했다. 주제를 잡아서 그걸로 연작을 써가면 어떨까 싶었다. 그런데 잘 안된다. 실은 잘 안된다는 것을 적어놓으려고 들어왔다. '글이 써지지 않는다면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써라.' 라는 누군가의 말마따라 말이지. 그 누군가를 생각해보니 요새 <직업으로서의 소설가>하루키 에세이로 난리도 아니라는 것을 좀 말하고 싶어졌다. 나는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라도 살 수 있는 잠재 독자 1이다. 언젠간 사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세상에, <하루키 씨를 조심하세요>라는 책도 나왔다. 조심해야 할 것이 참 많지만, 하루키를 조심해야 할 줄은. 난감한 것은 하루키를 조심하라는 책이 하루키가 쓴 에세이보다 목차상 더 재밌을 것 같다는 거다.

 

요새 부쩍 일찍 자지만, 11시 24분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쓰고 있다. 한 시고 두 시고 대중없이 자던 나의 밤은 열 한시 반에서 열 두시 사이로 평평해졌다. 토닥이기 좋다. 


 


렇다면 생각은 하고 사니



글을 전혀 쓰지 않는데, 그렇담 무엇을 읽고는 있느냐. 

보르헤스 전집을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그렇담 무슨 생각은 하고 있는가.

지금은 콩나물 국밥 생각을 하고 있다. 


  

난감하게도 왼쪽 판본으로 갖고 있다. 아직도 못 읽고 있는 건 표지의 탓도 조금은 있다.


콩나물 국밥

그는 내가 콩나물 국밥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잘 모르므로, 우선은 콩나물 국밥을 먹어보았느냐고 물었다. 거기에 익힐듯 말듯 들어가는 수란을 말하다가, 가수 수란이야기로 넘어갔다. <마네퀸>이라는 노래를 안다고 하니 그게 언젯적 노래냐고 타박을 했지만(!) 나는 어제들었으므로 나에게는 어제의 노래. <청취의 과거>를 읽고 있다 유투브를 보면서 나는 이 최초의 음성, 그러나 수 백 수 천으로 이뤄졌을 단 한 개의 노래에 아득하다. 레코드와 라이브에 대해서. '진짜'와 진짜'같은' 노래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진짜로 '듣고' 있는 걸까? 이 복제의 음들에서?

 



콩나물 국밥2

그는 콩나물 국밥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콩나물 국밥에는 콩나물이 너무 많지 않니? 내내 생각해보았다. 콩나물 국밥에 콩나물이 왜 이렇게 가득한가. 생각한 두 개의 가설은 이렇다. 조금이라도 덜 들게 되면 콩나물 국밥이 아니게(아니라고) (할)될까봐. 콩나물 국밥이고 싶은데 못될까봐. 사실은 콩나물이 두 개만 들어가도 콩나물 국밥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렇다면 반대로, 국밥 그릇을 가득 채우는 정도로는 콩나물 국밥으로는 가능하다는 말일까? 국그릇 자체는 콩나물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일까?


그는 언젠가 콩나물 국밥을 먹으면서 왜 이렇게 콩나물이 많은 걸까 생각했다. 그는 아마도 반 정도만 들어도 콩나물 국밥이라고 불러줄 수 있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이토록 극성, 이토록 최선, 이토록 콩나물로 가득해야만 <콩나물 국밥>으로 불러주는 이름에 의문을(약간은 염증을) 느꼈던걸까? 다음에 콩나물 국밥을 먹으면서 더 생각해 봐야겠다.  



오십 칠분을 지나고 있다. 열 한시, 오십 칠 분. 졸리고, 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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