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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맛

대게 소회

_봄밤 2015. 11. 12. 00:28

 

 

 

 

어젯밤부터 비였다. 많이 내리진 않았지만 바람이 불어 제멋대로 날렸다. 가냘픈 우산을 피느니 맞기로 한. 몸이 어지간히 데워졌기 때문이다. 뻑적지근하게 무슨 일이라도 끝낸 사람처럼 거만해져서 이런 비쯤이야 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저마다 모자를 쓴다, 담배를 핀다, 수선거리다가 수분 내 흩어졌다. 그밤, 있던 자리는 빗방울이 제멋대로 치고 있을 것이다... 게를 먹고 헤어지는 길이었다. 게껍질을 쌓아놓는 대접을 몇 차례 바꿨다. 역사 계단을 내려오며 엊그제 게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좋아하지요. 라고 대답했던 일을 생각했다. 같은 물음을 받았던 회사 사람들은 대체로 미적지근한 반응이 돌아왔음에 다분히 좋아하지요라는 분명한 호감을 보였던 것이다. 기억하기로 찐 게는 먹는데 위화감이 없다. 살이 희고 깨끗하다. 고기처럼 핏물이 나오는 것 아니고 회처럼 징그러운 것 아니다. 그게 좋다는 것이었다. 길게 할 말은 아니었고 할 생각도 없었다. 어디 뷔페에서 다릿살을 몇 번 발라먹은 적은 있지만 그날처럼 게를 통째로 쪄가지고 다리를 분질러가며 먹었던 것은 아마 처음같았다. 나는 그렇게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렇게'에 포함되는 '게' 역시 좋아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대게가 두 마리, 저쪽 상에는 킹크랩이 한 마리. 주방으로 가야하는 서더리가 상위에 올라와 핏물이 고였다. 킹크랩은 애 머리만 한 크기었다. 어마어마했고, 이전의 어떤 먹을 것과 할데 없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다리를 먹기 좋게 잘라놓은 것을 가져와 먹는 것과 몸 통째를 성히 쪄내온 것을 일일이 부숴 먹는 것은 너무나 달랐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죽어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그걸 사정없이 뜯어낸다. 가공은 마음의 부채 또한 보기좋게 포장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기억한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져 있는 소와 돼지, . 유통기한이 적힌 진공의 포장은 그것을 잘게 부수는 과정을 팽팽히 숨긴다. 그래야 먹을 수 있다. 내 대신에 그 모든 것을 보는 눈 덕분으로 죄책감 미뤄 왔으나. 어디에선가는 치뤄야할 댓가가 막막했다. 피가 무심한 도마에 물을 치는 비릿한 작업장. 칼질에 뼈를 다치지 않고 살을 발라내는 K가 생각났다. 그는 말을 점점 잃어갔고, 사실이야 매일 닦는 도마와 지워지지 않는 피냄새에서 말이 늘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게 사람이 하는 일이었. 젓가락을 내려 놓으니 소리가 났다.


킹크랩보다 대게는 작아서 그렇게까지 으악스런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다리 열 개를 똑똑 따서 먹는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무심하게 먹다보니 대게 살로 밥 한공기 만큼 먹은것 같았다. 사람들은 킹크랩이 더 맛있다며 한 마디씩 올렸다. 맛에는 행위가 포함된다. 세상의 맛을 갖고 있어도 그렇게 먹는 것에서 기쁨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대게는 킹크랩보다 훨씬 작아서 부수는 마음이 덜 했다. 맛이 간소한 게 대게가 더 나았다.

 

그러나 크기가 클수록 마음이 저어하고 작을수록 덜하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작은 것은 '그래도' 된다는 것은 소품처럼 잔인을 두고 이 정도면 이곳과 꽤 어울리지 않느냐며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일 같았다. 크다는 것은 무슨 기준으로 큰 것인가. 멀리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그래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의 기준은 미안하지만 내 만치의 몸을 기준했다. 그러나 이것도 술을 먹으면 흐트러져 모든게 다 슬퍼지는 때가 있었다. 술을 크게 먹고 그때마다 안주를 보며 울던 일이다. 낙지가 불쌍하다거나 게가 불쌍하다는 거다. 낙지는 아직 죽지 않아서 다리를 움직이며 빨간 양념에 덮혀서는 불판에 구워지고 있었고, 게딱지가 불에 달궈져 붉어진다고 울었다. 술로 나를 잃어버리고는 나는 낙지만치 작아지고 게 만치 딱딱해져 수난을 겪는 것이다. 종내의 ''는 그 바깥에서 하나도 괴롭지 않을거면서 슬픔을 연기했다. 


연기하는 슬픔으로라도 마음의 값을 치르던 날을 지나 이제는 그런 체도 없이 묵묵히 게 껍질을 부수고 게살을 바른다. 마침내 애 머리만한 뚜껑을 드러내고 내장과 밥과 김을 볶아 먹은 후에야 그날의 끝이 보였는데, 소리가 나게 벅벅 게껍질에 숟가락을 대고는 그 밥이 진짜라는 엄지에 처연함이 더했다. 그리고 같은 자리, 입때까지 살 하나 발라먹은 일 없이 회 한점 손 댄이 없이 자리를 지킨 이가 있었다. 그는 몸이 좋지 않아 찬 것을 먹지 못한다고 했다. 대게도 입에 거의 대지 않았다. 그것은 차지 않았으므로 연유를 알 수 없다. 화살은 저도 모르게 그의 깨끗한 접시로 향했다. 모두가 손을 걷어 붙여 죄를 나누어 가지는 돈독한 활기속에 너의 입술이 깨끗하다는 이유로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테제로 몰아넣는 기미가, 비워지는 술잔과 채워지지 않는 술잔 사이에서 고개를 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대게를 작게 말하니 그날 상다리를 부러워하는 대답이 고인다. '내 생각 안났어?' 나는 잔인이고 죄고 뭐고 헝클어지는 생각들에 쌓인다. 먹을 수 없는 것 앞에서 다분 글자 놀음을 했던 건 아닌지 말이다. 대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간의 행복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애 머리통만한 껍질을 앞에 두고 안쪽에 뽀얗게 붙어있는 살을 먹는 질감을 역시 행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나는 그날의 상을 내 힘으로 펼 수 있는 재간이 없다. 꾸리지도 못할 상을 두고 나는 죄니 뭐니라는 말을 붙여가며 게걸스럽게 붙어드는 저녁을 나무라고 있었던 거다. 낙지와 게가 되지 못하며 슬퍼하던 그날의 연기가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기쁘게 게다리를 뜯어주며 자, 여기 살을 발라먹으면 돼, 라고 알려줄 언젠가의 나를 일찌감치 글렀다 여기고 - 저녁의 장면을 물리며 대게를 뜯어먹어야 하는 아주 못된 자리였다고 매김했던 것은 아닌지. 그게 얼마나 큰 게였는지, 아무리 말해줘도 모를 동생 앞에서 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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