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소곤

희랍어 사전-한강

_봄밤 2014. 1. 12. 22:52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p105

 

내가 앉아 있던 알루미늄 의자와, 사분의 일쯤 남겨 놓은 내 치즈케이크 접시가 차츰 멀어지더니 보이지 않게 되었어. 
너와 조금도 닮지 않은 임마뉴엘의 모습이 차츰 멀어지더니 흐릿해졌어. 백운대와 인수봉을 닮은 흰 바위 봉우리들이 서서히 더 멀어지다가, 
배가 협곡을 돌아가자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어.
그때 왜 그렇게 가슴이 서늘해졌던 걸까. 느리디 느린 작별을 고하는 것 같던 그 광경이, 헤아릴 수 없는 무슨 말들로 가득 찬 것 같던 침묵이, 
여태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마치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대답해주었던 것처럼. 
뼈아픈 축복 같은 대답은 이미 주어졌으니, 어떻게든 그걸 내 힘으로 이해해내야 하는 것처럼. 

p115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p161

 

 

어둠을 향해 두 눈을 뜬 채 그는 아직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다. 틀려서는 안 되는 무게를 재는 것 같다고 느낀다. 
틀려버리고 말 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이 정말로 두렵다고 느낀다. 

p182

 



 

 

+

여름 끝에 물린 

매미 허물이 

허물을 벗겨내고 있었다.

얇디얇게 떨어지는 속. 

투명한 것이 천천히 내린다. 

허물은 울지 않았지만 매미가 분명했다.

 

개미가 

죽은 잠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구겨진 날개가 날아갔다 

잠자리는 없는데 

날개가 날아다녔다. 

바람을 타다가

금이 가기 시작한 날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해다. 

 

천천히 내려앉는 날개 밑에 

천천히 내리는 허물이 있다

날개는 허물과 만나서 함께 내렸다

 

햇빛이 두 개의 투명을 지났다

 

+

<이 둘이 만났을 과정을 설명한 다음 

서로가 공중을 만드는 움직임을 계산하고

그때 빛이 그릴 색깔과 모양을 서술하시오>

 

라는 문제가 있었다. <희랍어 시간>은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 눈을 잃어가는 남자 : 채널 예스





작성 : 2013/12/03 01:0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