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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면들

 

 

                                                                               이성복

 

 

 어느 날 당신은 벌겋게 익은 수박 속을 숟가락으로 파먹다가 갑자

기 그 수박을 길러낸 식물(그걸 수박풀이라 해야 되나, 수박나무라 해

야 되나), 그저 잔가시가 촘촘히 붙은 뻣센 넝쿨과 호박잎을 닮은 잎

새 몇 장으로 땅바닥을 기는 그 식물이 불쌍하게 생각된 적은 없는

지. 여름날 뙤약볕에 쪼그리고 앉아 땅속 깊이 주둥이를 박고 벌컥벌

컥 물을 길어올려 벌건 과즙으로 됫박만한 수박통을 다그 채운 끈기

와 정성은 대체 어디서 전수받았으며, 어디서 보상받을 것인가. 단

지 쥐똥만한 제 씨알들을 멀리 날라줄지도 모를 낯선 것들에 대한 대

접으로는 도에 지나친, 그 멍청한 희생을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어느 날 당신은 고속도로에서 밤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흰 눈송이

같은 것이 차 유리창을 스치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떠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밤꽃 향기 진동하는 오월의 따스한 밤, 그 많은 눈송이

들이 앞서가는 닭장차에서 날려오는 하얀 닭털이었음을 알았을 때

의 경이를 아직도 기억하는가. 십층도 넘는 철망 아파트 칸칸이 분

양받은 수백 마리 하얀 닭들이 쇠기둥 사이로 모가지를 빼내 물고 파

들파들 떨면서 날려 보내던 흰 날개 깃털들, 애초에 겨울에 오는 흰

눈도 그렇게 해서 빠진 가엾은 깃털이었던가. 어쩌면 그 흰 터럭지는

입관 직전 알코올에 적신 거즈로 마구 문질러 시멘트 바닥에 흩어지

던 사랑하는 어머니의 머리칼이 아니었던가.

 

 

 어느 날 해거름 당신은 늘 병목 현상을 일으키는 시내 진입로를 통

과하면서 부잣집 마나님마냥 토실토실 살진 돼지들이 허연 돼지털

코트를 걸쳐입고 도축장으로 실려가는 것을 본 적 있는가(그 돼지들,

언젠가 뇌물받은 장관 부인들과 함께 사회복지시설 방문하러 간 적도 있

었던가). 나들이 꿈에 부푼 그 돼지들, 입도 코도 발도 항문도 음부도

너무너무 아름다운 분홍빛이었고, 저희들끼리도 너무너무 아름다운

분홍빛인 줄 알았던지, 흥분한 한 녀석 다른 녀석 음부를 냄새맡다가

쪽쪽 핥아보다가 은근슬쩍 기어올라타다가 야단맞던 모습 보면서,

그때 당신은 당신의 성(性)이 들켜버린 낭패감을 어떻게 감추었던

가. 그때 노을이 붉었던가. 그냥 돼지 음부의 분홍빛이었던가.

 

 

 어느 날 당신은 교회신자들 야유회 같은 데서 보신탕 파티에 끼어

본 적이 있는가. 다리 아래 솥 걸어놓고 진국이 펄펄 끓는 동안 가정

과 세계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 끝나 저마다 뜨거운 국물을 나

눌 때, 평소 사람 좋은 신도회장이 무슨 꼬랑지 같고 막대기 같기도

한 작은 것을 잡아 흔들며 "에, 이 만년필로 말할 것 같으면…" 하

고 걸쭉한 농을 할 때, 온몸 다 바쳐도 끝나지 않던 죽은 짐승의 치욕

을 오래 생각한 적은 없는지. 뜨거운 국물에 졸아들 대로 졸아든 그것

이 전생의 당신 몸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혹시 내생의 것은 아닐는지.

 

 

 유치한 당신, 당신은 잊지 못할 것이다. 눈에 흙 들어갈 때까지, 눈

에 흙 들어간 뒤에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성복, 『이성복 산문집 :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 꽃잎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문학동네, 2001.



 

 

작성 : 2013/10/2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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